바나나의 의미

일본, 도쿄

by 나예

일본에는 오미야게(お土産)라는 다소 독특한 문화가 있다. 여행을 다녀오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간단한 선물을 하는 것인데 이러한 행위 자체는 세상 어디에나 있는, 문화라고 할 것도 없는 사소한 것이지만 일본에서는 다소 강박적이라 할 만큼 이런 선물을 챙긴다. 그렇다 보니 그 지역의 특색을 품고 있는 각종 선물들 또한 엄청나게 발달했는데 지역 별로 오미야게를 소개하고 추천하는 책까지 있을 정도다. 한국에서도 일본 여행을 가는 경우가 크게 늘면서 오미야게 용도로 개발된 일본의 상품들도 많이 국내에 들어왔다.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도쿄 바나나.


요즘의 바나나는 가장 저렴한 과일 중 하나가 되어버렸지만 예전의 바나나는 아주 비싼 과일이라 소풍 날처럼 특별한 날에나 하나 먹어볼까 말까 하는 귀한 몸이었고, 군납 용도 외에는 철저히 수입 제한을 받는 품목이었기에 우루과이 라운드로 완전 자유화가 될 때까지는 백화점에서나 겨우 구경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나는 그런 일들을 직접 경험해본 세대도 아니고 바나나 같은 시시한 걸 굳이 그렇게 비싼 값을 치르고 먹어야 하나? 하는 다소 시큰둥한 입장이이었지만 대학에서 독어독문학 강의를 듣고부터는 바나나에 관심이 생겼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 동독 사람들이 서독 쪽으로 넘어와 트렁크 가득 바나나를 사갔다는 이야기나 '모두가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모토와 달리 실제로는 (극소수를 제외한) 모두가 배고파져 버린 공산주의의 모순을 풍자할 때 꽤 자주 바나나가 등장하는 모습을 보며, 한동안은 바나나가 단순한 과일이 아니라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상징하는 아이콘처럼 보이기도 했었다. "나침반이 없을 때 베를린에서 동쪽과 서쪽을 구분하는 방법은? 베를린 장벽 위에 바나나를 올려 두었을 때 베어 먹힌 쪽이 동쪽이다." 같은 개그나 교수님이 동독 지역에서 유학을 했던 시절 겪었던 에피소드를 꺼낼 때마다 "거기 바나나 있어요?" 등의 드립이 강의실에서 심심찮게 오갔다.

(사진 출처 : https://www.welt.de/geschichte/gallery133212050/Was-die-Banane-in-der-Wende-bedeutete.html )


뭐, 공산주의까지는 너무 멀리간 이야기다. 과거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바나나는 귀했다. 분명 많은 이들이 바나나를 맛 보기도 전부터 이미 바나나의 매력에 빠져있었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먹어보지도 않아 어떤 맛인지도 모르는 과일에 안달복달할 리는 없으니까. 이렇듯 바나나는 다른 과일과 달리 뭔가 '환상'의 이미지가 있다. 때문에 도쿄에서 바나나가 재배되지도 않는데 대체 왜 "도쿄 바나나" 같은 빵이 있는건지 의아할 수도 있지만 도리어 그렇기 때문에 이런 빵이 있는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바나나 커스터드 크림이 듬뿍 들은 폭신한 식감의 빵은 맛이 진한 커피보다는 은근한 맛의 잎 차와 더 잘 어울린다. 그래서 오늘의 음료는 아무것도 가향하지 않은 순수한 녹차. 포근한 오후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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