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베네치아
'상극'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님을 나이를 먹을 수록 점점 더 실감하게 된다. 서로 반대되는 것들은 무탈하게 함께 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어울리며 시너지를 내기는 더더욱 어렵다. 뜨거운 것과 차가운 것이 더해지면 미적지근해지고, 단 것과 쓴 것이 섞이면 밍숭맹숭해지며 그렇게 이도저도 아닌 존재가 되거나 물과 기름처럼 끝내 따로 놀게 되는 것이 보통의 세상사이건만 아포가토만큼은 '상극'보다는 '극과 극은 통한다'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Affogato'는 '빠지다'라는 의미의 이탈리아어이지만 커피가 아이스크림에 풍덩 빠졌다기보다는 아이스크림 위에 커피를 끼얹은 쪽에 가깝다. (커피에 아이스크림이 풍덩 빠진 음료는 일본에서 주로 만날 수 있는 플로트 float일 것이다.) 그런데 '끼얹다'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고 왜 굳이 '빠지다'라는 이름을 붙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빠지다' 쪽이 훨씬 정감있게 다가온다. '끼얹다'의 활용이 한정적인데 반해 '빠지다'라는 말은 아주 다양한 상황에서 일상적으로 사용되니까. 우리는 곤경에 빠지는 일이 연속되는 매일을 살며 너덜너덜해진 몸뚱이를 간신히 누이면 기절하듯 잠에 빠진다. 그러면서도 틈틈이 무언가의 매력에 빠져 한숨을 돌리고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는 정신 빠진 인생을 산다. 삶이 우리에게 한결같은 고난을 줄지라도 우리들 대부분은 순해 빠진 인간이기 때문에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 또 한번 삶에 속아넘어가는 것이다. 이쯤되면 커피에 아이스크림이 빠졌든, 아이스크림 위에 커피를 끼얹었든은 크게 상관이 없다. 그런 일은 별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아포가토가 맛있으려면 커피도 맛있어야하고 아이스크림도 맛있어야 한다. 이 둘은 하나가 부실할 때 다른 하나가 그 부분을 채워줄 수 있는 조합은 아니다. 그 둘은 너무 다른 형질의 존재여서 다른 쪽에 본연의 역할을 미룰 수가 없다. 공동으로 수행하는 과제를 받았을 때, 노력없이 올라타는 얄미운 인간들은 꼭 있었다. 그렇지만 아포가토에 있어서 만큼은 커피도 아이스크림도 제 역할을 모두 해내야만 한다. 태생적으로 무임승차가 불가능한, 아주 당찬 친구들의 모임이 바로 아포가토다.
습관적으로 홀짝거리는 커피 외에 간절하게 커피가 필요할 때는 극도의 피곤함을 느낄 때일 것이다. 피곤함은 카페인과 당을 동시에 필요로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때 아포가토는 최적의 선택지가 되어준다. 차가운 아이스크림과 뜨거운 에스프레소가 만나면 그 열기 때문에 아이스크림이 순식간에 녹아버릴 것 같지만 아이스크림은 생각보다 커피 향을 머금은 채 오래 버틴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늘어져 게으름을 피우다가는 어느 새 곤죽이 되어버린다. 적당히 아이스크림이 녹아 부드러워지는 그 정도의 시간이 하던 일의 흐름을 깨지 않으면서도 적절한 리프레쉬를 시켜주는 최상의 휴식 시간이라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쉬어도 쉬어도 피곤한 나날들. 나이를 먹을수록, 연차가 쌓일수록 요구받는 일들은 많아지고 설상가상으로 날마저 무덥다. 어차피 나는 나를 둘러싼 기대들을 박차고 달아날 수는 없는 인간. 그나마 바랄 수 있는 것은 계절의 변화 뿐이다. 어서 선선한 바람이 불기를. 아이스크림이 생각나지 않는 계절이 오기를-
※ 본문에서 밝혔듯 아포가토의 맛을 책임지는 것은 커피와 아이스크림. 이탈리아에서 만났던 커피와 아이스크림은 모두 완벽한 맛이었다. 아래는 이탈리아에서 나를 녹아내리게 했던 아이스크림들.
※ 이탈리아의 커피가 얼마나 맛있는지는 아래 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