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제곱미터의 우주
바람이 매섭게 불던 12월 어느 날, 그곳으로 향한 건 별 다른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너무 추워 어딘가 들어가 몸을 녹일 곳을 찾고 있었다. 이미 커피를 마신 터라 카페에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문득 캐럴이 흘러나오는 매장들 사이로 불빛이 번쩍거리는 매장이 눈에 들어왔다.
간판에 쓰여 있는 이름은, X오락실.
한때 동네마다 하나씩 있었던 오락실을 찾기가 쉽지 않다. 언제 마지막으로 가봤더라. 흐린 기억을 되짚어 본다. 1999년, 중학생이었던 나는 학원 수업이 끝나고 집에 가는 길이면 집 근처에 있던 오락실로 향했다. 대화가 불가능할 정도로 크게 들려오는 오락기의 기계음은 학교와 학원을 도망치듯 빠져나가는 발걸음 마냥 쿵쿵거리며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세계 종말을 두려워하는 19세기 인간들의 막연한 공포를 감추기 위한 일종의 신호였다. 불안해. 두려워. 궁금해. 외로워. 이런 말을 표현할 줄 모르는 인류는 세기말의 예민한 떨림을 테크노와 힙합에 담았다.
“이제 시작해 볼까.”
친구 녀석은 오락실에 들어서자마자 늘어선 기계 앞으로 다가갔다.
동전을 넣으면 화면이 바뀌었고 노래 제목과 가수의 이름이 적힌 앨범 사진이 나왔다. 사진을 옆으로 휙휙 서너 번 넘겨 곡을 정하고 한 발을 들어 쿵 내리찍으면 본격적으로 게임이 시작된다. 그렇지, 시작은 무조건 ‘터키행진곡’이지. 생각은 머리로 하고 공부는 손으로 하는 거라면 클래식은 발로 배우는 거라고 믿었다. 발로 쾅쾅 찍으면 굿, 구레잇, 영어로 칭찬을 듣는 이 기가 막힌 게임의 이름은 ‘펌프’다.
가뿐하게 행진곡을 끝내면 다음 차례가 이어진다. 베토벤바이러스, 듀스의 <우리는>을 거쳐 노바소닉의 <또 다른 진심>이 흘러나오면 잠시 옷매무새를 고쳤다. 다시 시작된 스텝. '웃기지 마라 우린 그저 끝난 것뿐인데'. 일기장에서 튀어나온 듯한 직설적인 가사에 진심인 우리는 저항 시인이라도 된 것처럼 잔뜩 긁은 거친 목소리로 가사를 따라 외치며 머리채를 흔들었다. 그러고 나서 다다른 마지막 곡은 타샤니의 <경고>. 녀석은 내게 올라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나는 교복 재킷을 옆에 벗어 두고 녀석 옆에 섰다. 같은 동작을 함께 추며 더블로 발을 굴릴 때마다, 경쾌한 기계 음성이 Perfect를 외쳤고 뒤에서 보고 있던 교복들도 나이스로 화답했다. 녀석과 나는 활짝 웃으며 마지막 발자국을 찍었다. 어깨너비의 정사각 바닥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2000년 3월, 나는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여전히 학교와 학원을 오가는 일상은 변함이 없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는 게 시시했지만 한편으론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사이버 괴물에 습격을 당하지 않았고, 출처 모를 전단지에 쓰인 12월 31일의 행성 충돌도 발생하지 않았으며, 북에서 보낸 핵폭탄이나 생화학 테러도 없었으니까. 컴퓨터를 켜면 모든 데이터가 날아가고 전 세계의 전산망이 마비될 거라는 예언과 다르게 2000년 1월 1일에도 나와 동생은 삼국지와 포트리스를 하고 있었으니까.
지구 종말은 한 세기 늦춰진 듯했지만 21세기는 여전히 판타지 만화에나 나오는 배경처럼 어색했다. 앞자리 하나만 바뀌는 것뿐인데 익숙한 것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었다. 사이버 가수가 등장하고 스타크래프트와 리니지가 인기를 끌더니 두 블록 거리에 있던 작은 오락실은 문을 닫았고 그 자리엔 PC방이 생겼다. Perfect 했던 녀석도 다른 고등학교를 배정받으면서 연락이 끊겼고 펌프를 하러 다니는 시간도 자연스레 줄었다. 그렇게 수개월이 지나고서야 알게 되었다. 지구는 종말 하지 않았지만, 나의 무대는 종료했는지도 모른다고.
바람은 더욱 매서워졌고 다른 대안을 찾을 틈도 없이 오락실로 뛰어 들어갔다. 어두운 매장 안에는 밖에서 보는 것보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아직도 저게 있다니. 튀어나오는 말을 혼잣말로 겨우 삼키며 발견한 고전 게임 코너, 농구와 총 쏘기와 카레이싱으로 구성된 액티비티 코너, 그리고 더 많은 곡들이 채워진 펌프도 한 켠에 남아있었다. 당장이라도 노래가 흘러나올 것만 같은 정 사각 무대는 새천년이 시작한 뒤로 몇몇 매니아를 제외하고는 발길이 뜸했다. 녀석을 잠시 떠올리며 펌프와 인형 뽑기 코너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갔다. 여기 어딘 가에 있을 텐데. 아, 찾았다.
겨우 찾아낸 건 오락실 구석에 난 작은 문이었다. 그 문을 열면, 가장 요란한 곳에서 가장 조용히 머물 수 있는 곳, 시간이 몇 곱절은 빠르게 흐르는 곳에서 늑장을 부리며 묻지마 템포로 버틸 수 있는 곳, 규모가 어느 정도 되는 오락실이면 가장 안쪽에 위치한 그곳을 만나게 된다. 버튼만 누르면 달라지는 판타지 세상의 끝, 그곳은 바로 오래방이었다.
3.3 제곱미터.
오락실에 설치된 간이 노래방의 평균 면적이다. 노래방 기계와 의자가 두 개와 함께 나에게 허락된 공간의 면적이다. 기지개를 켜면 손이 벽에 닿을 만큼 아늑한 그곳은 무언가를 하기엔 좁을지 몰라도 노래 한 곡 거하게 뽑으며 박자에 몸을 실을 수 있는 만큼 충분히 넓었다. 혼자 내버려 뒀으면 좋겠다는 십 대 소녀의 은밀한 일탈을 허락할 첫 공간으로도 충분히 훌륭했다.
불쑥 화가 날 때 가슴에 있는 걸 토해내듯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집 앞에 보이는 산은 고성방가만을 위해 오르기엔 다소 높았다. 인적이 뜸한 골목은 괜찮을까 싶어 가보니 담배 연기가 자욱한 교복 무리들이 이미 구석을 차지한 뒤였다. 나보다 어려 보이는 데 벌써부터 무슨 근심이 그리 많은 지 다들 머리 위로 먹구름이 잔뜩 꼈다. 그들 옆에서 부르기를 포기하고 결국 큰길로 돌아 나와 걷고 깊숙한 곳으로, 더 깊숙한 곳으로 찾다가 만난 게 바로 이 문이었다. 노래방 화면만 덩그러니 켜진 유리창 안쪽의 어둡지만 찬란한 방. 어떤 미지의 세상으로 통할 것 같은 그 방을 찾아낸 것이었다.
GOD노래를 부르며 웃다가 이정현 노래를 지르다가 김동률 노래를 부르며 또 울다가, X-Japan 노래는 틀어둔 채 그저 듣다가, 또다시 토이 노래를 따라 부르며 엉킨 감정들을 한 곡씩, 한 올씩 풀었다. 회전 조명이 비추는 빛에 목소리를 맡긴 채 눈을 감았다 뜨면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혼자 나는 기분이 들었다. 때때로 오래방이 붐비는 시간에 고등학생 언니들이 선수를 치면 삼십 분은 족히 기다려야 했지만 상관없었다. 언니들의 고음(사실상 비명에 가까웠다)과 응원 곡 모멘트(이 부분에선 중간에 울컥하는 목소리가 자주 들린다)를 그대로 지켜보는 것 또한 오래방이 주는 기묘한 풍경임을 알았으니까.
마침 아무도 없는 것 같아 문을 천천히 열었다. 고객을 반기는 경쾌한 음성이 들려왔다. 무슨 노래를 불러야 하지. 요즘에 듣던 노래가 뭐였지. 한참을 고민하다 예전에 부르던 노래들을 예약했다. 조명이 꺼지자 전주가 흘러나왔다. 잠시 눈을 감았다 떠보니 별이 쏟아졌다. 비로소 알게 되었다. 어린 내가 즐겨 부르던 노래 가사처럼, 나의 작은 무대들이, 소란한 듯 다정했던 나의 노래들이, 잠시 나의 곁에 살았다는 걸.
현재곡 4095 <내가 너의 곁에 잠시 살았다는 걸> 토이
그것만 기억해 줄 수 있겠니
내가 너의 곁에 잠시 살았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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