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넘게 규제 산업에서 일하다 처음 도전하는 IT회사였다. 스타트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작은 규모의 한국 지사에서, 완전히 새로운 업무를 맡아 이끌어 가는 포지션이었다.
내가 과연 그곳에서 잘할 수 있을까. 기대가 클 텐데 내가 실망시키진 않을까.
나는 우리 집의 첫째 아이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장녀이다.
그 때문이었을까. 나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책임감을 느끼고 기대에 부응하려고 노력했다. 기본 기능을 탑재한 로봇처럼 당연하게 여겼다. 무슨 일이든 어느 정도 적당히라도 해내야만 했고, 내가 실망시키지 않았음을 타인의 반응을 살피며 확인하고서야 두 다리 뻗고 잠을 잘 수 있었다. 칭찬을 받거나, 역시 넌 믿음직해 등의 반응 말이다.
당장 내일 첫 출근을 하기로 되어 있으니 딱히 방법은 없었다. 난 태연한 척 책을 펼쳤다.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영 부진하다.
남편이 한마디 던진다. 회사에 맞는 인재니까 뽑았겠지, 뭘 그렇게 미리 걱정해. 실망스럽다 해도 그들의 몫이지, 그들의 실망감까지 네가 안고 갈 필요는 없잖아.
맞는 말만 꼬박꼬박 귀에 꽂아 넣어주는 친절한 남편이다. 나도 잘 알고 있는 바이다. 내가 바짓가랑이 붙잡고 제발 입사시켜 달라고 애원해서 출근하는 게 아니지 않나. 그들도 분명 내가 필요하니 뽑았을 텐데 난 시키지도 않은 책임감을 벌써 느끼고 "을"질을 부지런히 연습하고 있다. 첫 이직도 아닌데 혼자 잔뜩 겁먹고 초조해하는 내 모습을 그들이 안다면 날 뽑았을까?
불안은 불필요한 불안을 낳았고 자자손손 이어진 불안은 마음속을 정복했다.
이직을 위해 고민하고 또 고민했던 밤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난 아직 새로운 도전을 기꺼이 즐길 수 있는 강한 사람이야.
난 보란 듯이 나의 능력을 증명해 보이겠노라 마음먹고 평소처럼 당당하게 출근하며 말한다.
봤지? 난 아직 강해.
역시 일을 빨리빨리 제대로 처리하시네요. 역시!
'역시'라는 단어는 기대에 부응했다는 의미를 강조할 때 사용하는 부사이다. 이 말로 시작하는 문장이 들리면 안심이 된다.
난 이번에도 기대에 부응했다. 딱 그들이 좋아할 만큼 열심히 했다. 딱 그것뿐이었다.
모두가 잠든 밤, 난 잠을 청하지 못하고 혼자 식탁에 앉았다.
물끄러미 물 잔을 바라보며 회사에서의 나를 떠올려 보았다.
업무는 금방 적응했다. 이직하고 직급이 오르고 월급도 올랐다. 그런데 가슴이 답답했다. 울컥했다. 설명할 수 없는 우울이 밀려왔다.
완벽한 명함 뒤에 우울한 내가 숨어 있었다. 주먹을 입에 물고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하나도 행복하지 않아. 나는 이 일을 하고 싶지 않아.
결국 나는 그 일을 그만두었다.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일을 그만둔 것은 처음이었다.
1년 전에 심사숙고하여 내린 결심은 와르르 무너졌다. 완전히 틀렸구나.
내가 틀렸다.
'틀렸다'는 사실로 내 인생은 틀렸다. 그냥 다 틀렸다.
실망시키지 않고 두 번 실수하지 않기..... 는 망했다.
우리 집 꼬마가 수학 문제를 푼다고 열을 내며 앉아있다.
나름 끙끙대며 열심히 풀고 답을 적었는데 결국 답이 틀렸다고, 짜증을 내며 심통을 부린다.
지우개로 문제집을 박박 긁어댄다. 세신사도 저렇게 세게 때를 밀진 않을 텐데.
힘주어 썼던 답은 한 번에 지워지지 않는다. 지우개는 왜 이렇게 내 말을 안 듣는 거야. 괜히 멀쩡한 지우개한테 성을 낸다.
답이 틀리면 일단 '지우개로 답을 지워야 하니 짜증'이 난다.
그리고 '내 답이 틀렸다'는 사실에 화가 난다.
처음 가졌던 내 생각이 틀렸음을 받아들이기가 왜 그리 힘든 걸까.
내가 옳음을 바라는 마음 대신, 틀리면 다시 잘해야지라고 툴툴 털고 일어나기는 여전히 쉽지 않다.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가장 큰 산은 나 자신이고
그 산을 넘기 위한 가장 큰 벽은 완벽이다.
그 회사를 그만두고 나는 다시 내가 익숙하게 해 오던 업무로 돌아갔다.
새로운 일도 당연히 잘 해내리라 믿었는데 이렇게 다시 되돌아가는 모습이 마치 후퇴하는 패전 용사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이 후련했다.
억지로 구겨 넣어 맞춰온 틀을 다 벗어버리고
늘 입어오던 트레이닝복을 입은 것처럼.
왜 그렇게 어색한 기분을 애써 괜찮다고 거짓말하며
쉽게 포기하고 돌어서지 못하고 끙끙댄 걸까.
흔하게 저지르는 사소한 실수도
실수를 인정하기 어려워 다른 핑계로 덮고 무마한다.
내가 자주 하는 행동들이다.
눈을 감고 귀를 막고 나의 주변으로부터 철저히 격리된 상태라면 낫지 않을까.
때로는 나의 우주를 아주 작고 사소한 영역에 가둔 채 나 혼자 몰래 살고 싶다.
그것은 아마도 '일기에 점 하나만 찍고 아 속 시원해라고 외치는'짜릿함이지 않을까.
지금이 바로 진실의 방*으로 가야 할 시간인가 보다.
주변을 챙기는 건 덤, 결국 나와 맞짱 뜨기, 그것만 해보기로 한다.
마을을 세워야만 영웅이 되는 건 아니야. 자신의 실수를 용기 있게 인정할 때도 영웅은 탄생한단다. You don't become a hero only if you build a town. A hero is born even when he bravely admits his mistakes.
- 애니메이션 '심슨네 가족'에서 심슨이 아들에게 하는 말 -
*진실의 방: 영화 '범죄도시'에서 주인공 마석도가 범인을 심문하는 장소, CCTV의 사각지대. 즉 아무도 엿볼 수 없는 장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