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하게 다만 로맨틱하게 (Feat. 맥주)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 사수 에세이

by 헤이란
사소한 것들을 소중히 해야 해. 그것이 삶을 이루는 버팀목이니까.
You have to cherish the little things because that's the life supports.
- 심슨네 가족에서 -


읽은 책을 고르려고 책장을 기웃거리다 우연히 먼지가 수북한 노트 꾸러미를 찾았다.

대학생 때 쓰던 다이어리였다.

겉표지를 보는 순간 반가움을 감출 수 없다.

이 노트가 여기 있었네.

어느 날엔가 재미있게 읽었던 만화책을 다시 만난 것 같은 우연한 재회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사실 며칠 전부터 글을 쓰자고 마음은 먹지만

미세한 기억을 다시 긁어모으고 후벼 파며 뻣뻣한 뇌만 원망하던 차였다.

바싹 마른 입술만 깨물며 더 말라버린 글 재료가 간절했던 터, 왠지 무슨 이야기라도 숨어 있지 않을까.

뻔뻔한 독자는 과거의 저자를 소환한다.



그래 다시 해보자.

뇌가 굳게 잠긴 날은 주문이 필요하다. 이 노트는 그런 날을 위해 남겨둔 것일까. 첫 장을 넘기며 살랑살랑 주문을 건다.

노트를 썼던 그날, 별생각 없이 적었을 글들이다. 그러나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기록을 남기면 그것은 언젠가 다시 소환된다. 오늘 내가 이러고 있듯이.

지금 이 글도 머지않아 가까운 미래 어느 밤의 이불 킥으로 이어질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쑥스러운 낭만이 가득하던 이십 대의 글들을 다시 만났다.


사춘기를 어영부영 보내고

민증은 받았고 고졸 타이틀도 얻었지만

여전히 혼자 멍 때릴 다락에 숨을 시간이 필요한 어린 어른이었다.


그래서일까. 당시 내가 쓰던 다이어리의 이름은 가히 그러한 '나'다웠다.

'치열하게 다만 로맨틱하게'


좋아하는 형용사를 고르다 결국 성격이 다른 두 단어만 남았다. 둘 다 좋으니 둘 다 쓰기로 했었다.

치열함은 낮에 쓰는 노트의 표정이라면,

로맨틱은 밤에 쓰는 일기의 바람이었다.


그렇게 조합하여 만든 이름이지만

'청춘'이라는 단어 속, 봄날의 햇살과 다르게

홈피에 몰래 적은 글들의 날씨는 대부분 흐렸다.



이십 대의 절반쯤 왔을 때

나는 울창한 숲 한가운데 숨어있는 늪이었다.


주변에는 관대하지만 스스로에게는 혹독했다.

만족하지 못하고 자책하는 나는 늘,

위로와 칭찬에 굶주렸다.


빼곡하게 일정이 적혀있다. 뭘 그렇게까지 바쁘고 싶었던 걸까.

당시 나는 어떤 동력을 얻으려고 비슷한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실체 없는 동력이었다. 계속 별 볼 일 없는 대학생으로 머물러 있는 게 두려웠다.

스터디, 독서모임, 동호회 활동. 존재의 공허함을 채우려고 매일 바쁘고 늘 시간에 쫓겼다.

일을 벌이고 활동 영역을 넓혔다.

나라는 존재의 좌표를 바꾸며 마치 무언가를 정복하고 있다고 믿었다.


나는 어느 페이지에서 멈췄다. 차마 넘길 수 없었다.

늪은 스스로 나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너무 지친다. 너무 힘들다.



늪에 완전히 빠지기 직전

나는 낯익은 번호를 찾아 연락을 하곤 했다.

어릴 때보다 더 가까워지는 친구들이 있다.

맥주 한잔 할까.

오랜 시간을 같이 하며 이미 충분히 친한 사이지만

완전히 서로의 태양계로 얽히는 순간이 있다.

그들은 후미지고 음울한 나의 늪을 보고도 덤덤히 지나간다.

그들과 나는, 적절한 거리를 유지한, 적당한 관계가 된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답답할 때 나는 친구들을 찾고 맥주를 찾았다.

가볍게 시원하게 그렇지만 씁쓸한 맛의 전개는

달콤하지 않지만 결코 심각하지 않다. 마치 그들과 나의 대화처럼.


맥주잔의 주인들은 특별히 나와 많이 닮은 구석이 없었다.

목표가 비슷한 것도 아니다.

다만 나의 지독한 성질머리를 알고도 모른 척, 몰라도 아는 척하며 믿어주었다.

그래서 그들은 늘 똑같은 말만 했다.

네가 알아서 잘하겠지.


가장 황홀했을 것 같은 나의 이십 대는 그렇게 같이 늪에 빠지고 맥주를 마시며 흘러갔다.







이십 대의 계절은 치열하고 로맨틱하게 지나갔다.

그리고 다시 나에게 서툰 서른의 계절로 다가왔다.


매일을 기록한 나에게 감사한다.

순간을 함께했던 벗들이 그때도, 그 공간에도, 그리고 지금도 곁에 있음이 고맙다.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감정 조각도 귀히 여겨 짧게 혹은 구구절절 적어놓은 그 마음이 고맙다.


돌이켜보면 젊은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때때로 답을 알 수 없을 때,

새로운 경험을 마주하고 어려운 선택 앞에서 어쩔 줄 모르다 결국 과거의 서툰 나에게 물을 것이라는 것을.


내가 지금도 혼란스럽고 어려운 이유는

어쩌면, 여전히,

치열하게, 로맨틱하게 나의 좌표를 찾아 헤매고 있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젊은 나에게 맥주 한 잔을 건넨다.

그리고 이렇게 말해본다.

여전히 삶은 달콤하지 않지만 결코 심각하지 않다고, 네가 맞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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