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이 필요한 땐 캡틴 아메리카노(Feat. 커피)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 사수 에세이

by 헤이란

연차가 남아서 오래간만에 재택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느긋하게 거실 소파에 자리 잡고 TV 다시 보기를 눌렀다. 무엇을 정주행 해볼까. 편안하게 시청자 모드로 마음껏 퍼져있자며 옆으로 눕는데 뭔가 좀 거슬린다.


아이 등교 미션을 무사히 마쳤으나

그 흔적이 문제였다.


어설프게 치워진 식탁,

뱀이 빠져나간 듯 허물만 남은 얼룩덜룩한 초딩의 내복,

존재감을 유유히 뽐내는 각종 과자 부스러기,

줍고 또 주워도 어디선가 번식해서 또 나타나는 머리카락들.


나를 시험한다. 진짜 계속 모른 척 앉아있을 거냐고.


얼마 만에 이렇게 누리는 휴가인데....!

이번 휴가는 반드시 한량처럼 느긋하게 즐기기로 계획했기에, 다시 다짐한다.

조금만 이따 치우자. 일단 쉬자.

....

그렇게 말하며 엉덩이를 떼려다 다시 앉았으나 결국은 몇 분도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청소기로 향한다.



난 가장 최악의 상태를 뽐내는 공간을 골라, 버리고 쓸고 닦는다.

무슨 일이 있긴 했었나 싶을 정도의 정갈한 상태로 다듬어야 했다.


늘어지듯 누워서 쉬겠다던 오전의 계획은

대놓고 '청소하기'로 변경되었다.

내가 원하던 오전의 그림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청소를 시작했고

그 결과 집도 내 마음도 동치미 한 사발 들이킨 것처럼 한결 개운해졌다.



치우기만 했을 뿐인데 치료가 되었다.


나에게 있어 집정리는

단순하게 '오늘 해야 할 일'로 부르기 어렵다.


비록 작은 집이지만 그 공간을 대하는 마음에 따라 가치가 달라진다고 믿는다. 그런 최소한의 예우가 집정리라고 할 수 있겠다.


예의범절이 그렇듯

쓸고 닦는 일에도 모름지기 순서와 준비가 필요하다. 어디부터 공략하고 무엇으로 작업을 진행할지 정한다.


일단 바닥에 놓인 물건을 모두 한 곳에 모으고, 버릴 물건을 골라낸다. 그렇게 걸러진 물건들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며, 그렇게 치워지고 비로소 바닥이 얼굴을 드러낸다.

공간은

하루만 게으름을 피워도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라는 아저씨 얼굴 같아서

더 열심히 치우고 닦는다.


그렇다고 특별히 청소에 소질이 있거나 남다른 애정이 있는 건 아니다. 대단한 수납실력은 커녕, 늘 정리정돈이 스트레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간을 청소하는 일은, 공 들인 만큼 결과가 나온다는 점에서 다른 일에 비해 정직하고 공평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청소는 나름 자기에게 주는 괜찮은 미션이고 칭찬거리이다.

답답한 눈엣가시를 '치우'면서

사실은 나의 작아진 성취감을 '치유'한다.





이런 야단법석에는 한 잔 들이켤 게 필요하다.

머그컵에 아메리카노를 뽑아놓으니 진한 향이 올라온다.


그렇지, 매일 아침마다 한 모금 담는 각성의 향기다.


일꾼들이 목장갑을 끼기 전에 뻐금거리는 담배나

혹은 그물을 던지는 사공의 노래 가락이 그렇듯

머그컵을 든 나는 부지런 떠는 것이 귀찮지 않다.

그래, 이렇게 된 거, 치우며 놀아보자.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들 속에서
내 취향 가득 뽑아낸 한 잔의 힘



한가한 오전은 이렇게 물 건너갔다.


뜻대로 되지 않고 할 일만 많은 어설픈 휴가였다.

정직한 노동이 끝나고 나는

커피를 내리며

계획 따위 내려놓고

커피를 건네며

무뚝뚝한 위로를 건넨다.


직장 선배가 내게 이런 말을 해주곤 했다.

할 수 있는 것만 해. 안 되는 건 그냥 우주에 던져버려.


드라마 정주행은 실패했지만

작은 내 공간을 정돈했고

내 방식으로 무리하지 않게 나의 불편을 덜었다.

나의 우주는 편안해졌다.


그저 나는, 내 우주만 잘 지키면 되는구나.

나의 캡틴 아메리카노는 머그컵에 향기 가득, 그저 웃기만 한다. 나도 영웅처럼 웃어본다.

잘 치우며 잘 놀았다. 개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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