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을 위한 스팸 수프

by 헤이란

연말 마감을 앞두고 한가로이 혼자 사무실에 나왔다.


크리스마스 전후로 대부분 아껴둔 휴가를 쓰기에 사무실은 한적하다. 특히 우리 사업부는 대부분 휴가, 혹은 외근 중이어서 나 홀로 조용히 있을 예정이다.

우아하게 커피를 한 잔을 타서 곁에 두고 일을 시작한다.

그러나 혼자 남겨진 기분도 잠시, 전화벨이 울린다. "네, 확인하고 오늘 중으로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하나 해결하면 또 전화가 온다. "이번 주 중으로 완료될 예정이니 다시 알려드리겠습니다."


해결하지 못한 과제들로 할 일은 늘어만 간다.


한 해가 거의 다 끝났으니 일 년 치 업무도 거의 다 완성 중이라고 믿었으나

노래 한번 흥얼거릴 틈 없는 나의 마우스는 엑셀 H열 어딘가에서 멈췄고

연말 인사 정도는 과감하게 생략한 채 실시간으로 주고받는 이메일은 영락없는 한 겨울이다.


덩달아 해는 벌써 서쪽으로 퇴근 중.

좋겠다. 너는 늘 칼퇴할 수 있어서.

석양을 바라보며 멍청한 표정을 지어본다.

칼퇴는 글렀고 이대로 집에 가면 저녁밥이 아니라 야식을 먹어야 한다.


오케이. 일단 밥을 먹자.


뱃속에서 요란하게 아우성질이다. 밥구녕을 내주려고 먹자골목에 들어섰다.

무엇을 먹을까. 혼자 먹으면 그냥 먹고 싶은 걸 고르면 되니 쉬울 줄 알았는데. 오히려 예상치 못한 나 홀로 디너여서 고민에 빠진다.


혼자 먹기 좋은 게 뭐가 있을까.


혼밥에도 레벨이 있다고 한다. 예를 들면 햄버거는 난이도 '쉬움'에 속하고 숯불갈비는 난이도 '어려움'으로 본다. 어디선가 얼큰한 냄새가 난다. 부대찌개는 어떨까. 저걸 혼자 먹고 싶은데 고민이 된다. 혼밥 레벨 가이드(?)에 따르면 난이도 '중간'이상일 듯하다. 그러나 내가 너무 배고프고 부대찌개가 당길 땐, 난이도와 상관없이 나의 용기가 '높음'이 된다. 시원하게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갔다.


사장님 부대 1인분에 햄사리 추가요.

주문을 하고 나서 드는 생각이, 양이 너무 많은 거 아닌가.

혼자 와서 햄추가 하는 사람이 있으려나.

주변을 돌아본다. 혹시 혼자 드시는 분 없나. 레퍼런스가 필요해서 두리번거리지만 연말 저녁에 부대찌개를 찾는 사람이 많지 않나 보다. 평범하지 않은 주문을 넣은 게 민망해서 쩔쩔맨다. 이제 와서 주문을 바꾸면 더 진상이겠지. 주문이 과한 건지, 나의 걱정이 과한 건지.


마침 음식이 등장한다.

냄비에 담겨 나온 찌개를 마주하니 자세가 경건해진다. 남들이 어떻게 주문해 먹는지, 양이 과한 건 아닌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한 술 떠볼까.

햄 추가로 부대찌개는 더 강력해졌다.

나의 미소도 더 강력해졌다.




내가 왕이 될 (밥)상인가? 스팸만 있다면 그렇소이다



나이가 사십이 다 되어가지만, 어릴 때 먹었던 스팸의 첫맛은 잊을 수 없다.

맨날 분홍소시지만 먹다 사촌동생 집에서 처음 먹은 스팸구이는 정말 별미 중의 별미였다. 분홍소시지보다 값비싼 탓에, 명절에 스팸세트가 선물로 들어오면 겨우 한두 번 먹을 기회가 더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할아버지의 안주로 써야 했기에 수제 찌개에 스팸을 넣을 일은 거의 없었다. 나도 커서 술 마시며 저렇게 마음껏 먹을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랐다.


시간은 흘렀고 대학에 갔다.

선배들이 밥을 사주겠다며 나와 친구들을 식당으로 데리고 갔다. 나의 첫 부대찌개였다. 찌개에 빠진 스팸을 보고 당황했다. 스팸을 여기에 넣어 먹다니. 이 아까운 걸! 이름도 내 취향이 아니었다. 미안한 말이지만 군인들이 먹는 걸 굳이 돈 주고 사 먹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이거 정말 군인들이 먹는 거냐고 묻기도 했다. Y염색체가 없는 군대 면제자다운 질문이었다. 선배들은 소주를 시켜 한잔씩 채워주었다. 나도 술을 마시며 스팸을 실컷 먹으니 신기했다.


시간이 계속 흘렀다.

나도 선배가 되었고 시간은 또, 또, 흘러, 직장을 다니게 되었다. 시간은 어찌나 잔잔히 흘러가는지 모든 '나이 듦'은 소름 끼치도록 자연스러웠다.

어느새 대학을 다닌 날짜보다 야근을 한 날짜가 더 많은 고연차 회사원이 되었다.

해묵은 나의 스팸 예찬은

야근 저녁으로 먹은 스팸찌개와 진부한 회사이야기들로 차곡히 덮어졌다.


그리고 알게 된다.

추운 날, 이만한 안주가 없다는 걸 깨닫고 만다.

할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부대찌개 가득 끓여 한 상 차리고 소주 한잔 따라드릴 텐데.

스팸을 구우면 식구들이 방에서 하나둘씩 나와 모여 앉아 밥 한 끼 뚝딱 해치우던 그 시절이 새삼 그리워 혼자 붉은 눈으로 머리를 긁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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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팸 한 줄에 비엔나소시지, 라면, 고기, 각종 야채를 넣고 열정을 다해 끓여낸 이 녀석이 맛이 없으면 반칙이다.

소위 모든 걸 다 때려? 넣은 국물에 밥을 말아 밥수저 하나를 크게 뜬다. 입에 넣으니 적당히 얼큰하고 적당히 느끼한 목소리가 들린다. 오늘도 애썼다.


찌개는 흔한 요리이기에 단순히 생각하면 집에 가서 내가 직접 끓여 먹는 방법도 있긴 하다. 밀키트를 구하든 레시피를 검색해서 그대로 따라 하든 뭐라도 끓여 냈겠지. 그러나 오늘은 어떻게든 대접받고 싶었다. 찌개가 끓기 전에 한 젓가락씩 자리 잡은 반찬을 밥 숟가락에 올려 담아 먹고 싶었다. 그렇게 수저질하다 보면 어느새 밥그릇 바닥이 보일 즘 여전히 잔잔하게 끓고 있는 그런 수다스러운 찌개반상을 받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소시지 수프에 밥을 말며 영혼을 달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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