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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란 Apr 26. 2023

4/18 끝까지 읽어 내려갈 긴긴밤

필사적으로 필사일기 - <긴긴밤>

그때 노든의 대답이 얼마나 기적적인 것이었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이 다른 우리가 서로 밖에 없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그때는 몰랐었다.
축축한 모래를 밟으며 나는 바다를 향해 걸어갔다. 내 앞의 바다는 수도 없이 부서지고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두려웠다. 하지만 나는 내가 저 바닷물 속으로 곧 들어갈 것을, 모험을 떠나게 될 것을, 홀로 수많은 긴긴밤을 견뎌 내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긴긴밤 하늘에 반짝이는 별처럼 빛나는 무언가를 찾을 것이다.
어쩌면 언젠가, 다시 노든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내 냄새, 말투, 걸음걸이만으로 노든은 나를 알아보고 내게 다가와 줄 것이다. 코뿔소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다른 펭귄들은 무서워서 도망가겠지만, 나는 노든을 알아볼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코와 부리를 맞대고 다시 인사할 것이다.


<긴긴밤> 루리 저




가끔 아이에게 책을 읽어준다. 아이가 원해서 읽어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내가 읽어주고 싶은 글을 만나면 아이에게 청취자가 되어 달라고 한다. 이 책은 바로 그중 하나이다. 그리고 유일하게 끝까지 읽어주지 못한 책이기도 하다. 글을 읽어 내려가며 어떤 문장 앞에서 쉬고 또 어떤 문장 뒤에서 잠시 목소리를 떨었다. 아이는 내 목소리를 듣더니 자기에겐 이 책이 아직은 버겁다고 말했다. 무엇이 버겁냐고 물으니 너무 많은 헤어짐이 아프다고.


코뿔소 노든과 헤어지며 묵묵히 스스로 자신의 세상을 향해 걸어 나가는 아기 펭귄 치쿠는 기억 속의 얼굴들을 닮았다. 혼자 지하철을 타고 엄마를 만나러 나갔던 13살 때의 나를 닮았다. 두 돌을 겨우 넘긴 나의 아이가 처음 어린이집을 가던 날, 세상을 잃은 것처럼 통곡을 하며 나를 붙잡던 손을 닮았다. 친한 친구가 전학 가던 날 마지막 배웅을 마치고 돌아서며 던져 준 그 편지를 닮았다. 나의 떨리는 목소리를 듣고 내게 안기던 나의 아이를 닮았다.


치쿠가 걸어 들어간 바다는 수없이 많은 이들이 모험을 떠나며 흘린 헤어짐과 그리움의 물결이다. 바다를 품어서 그런 걸까. 헤어짐은 여전히 짜고 눈물 비린내로 가득하다. 언젠가 별이 쏟아지는 바다에서 나는 치쿠를 닮은 얼굴들을 만날 것이다. 바다로 가는 길이 여전히 긴긴밤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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