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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희 May 24. 2022

티베트 불교 미술 3

화가의 심미안과 통찰력으로 본  <핵심 미술 이야기> 


화가의 심미안과 통찰력으로 본

<핵심 미술 이야기>





티베트 미술 3



인도 나란다 대학


신라 시대 불법을 구하러

머나먼 천축국(인도)까지

구도 유학을 떠난 스님들이 있다.

그들의 최종 목적지는 나란다 대학이었다.

그들이 걸었던 길은 신라에서부터

중국 장안을 통해 둔황을 거쳐 

타클라마칸 사막을 가로질러 파미르 고원.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 서북부,

인도 동북부에 이르는 엄청나게 멀고

험한 죽을 수도 있는 길이었다.


기원전 250년경 아쇼카 왕이 나란다에 있는

사리불 스투파(탑)에 참배한 후 

나란다 사원을 건립한 것이

나란다 대학의 기원이 된다.

굽타 왕조는 쿠마라 굽타 1세(415~454)가

오늘날의 대학이라 할 수 있는 나란다사를

창건한 이후 역대 왕조에 의해 증축 확대되면서

최고, 최대의 불교 대학이 되었다.

5세기부터 12세기 700여 년 동안 나란다는 

불교 교육의 중심지였다.

가람의 크기는 가로 11k, 세로 5k에 이르며

많을 때는 5만여 스님들이 거주하였다 한다.

그러나 1199년 무슬림의 침략으로

승원과 장서들이 3개월 간 불에 타서 재가 된다.




현장 법사와 혜초 


나란다 대학에서 공부한 학승으로

중국의 현장(602~664) 법사를 빠뜨릴 수 없다.

당나라 초기의 고승이자 불서 번역가인 그는

삼장으로도 불린다. 

이 현장 법사를 모티브로 한 소설이

명나라 때 써진 유명한 <서유기>이다.

그는 28세인 629년 인도로 구법 여행을 떠나서

16년 만인 645년에 귀국한다.

현장의 인도 및 중앙아시아 5만 리 길의 여행기인

<대당 서역기>에 의하면 640년경 

나란다 대학에는 전 세계에서 몰려든

1만여 명의 학승과 1천500여 명의 교수가

있었다고 한다.


나란다 대학을 거쳐 간 고승으로는

AD 2세기경에 대승 불교사에

찬란히 빛나는 용수(나가르주나)가 있었다.

그는 반야경의 공 사상과

아함경의 연기 사상에 근거한

중관 사상을 창안한다.

또한 5세기경에는 유식학을 완성한

무착(아상가)과 세친(바수반도)도 있었다.

이처럼 대승 불교의 양대 산맥인 

중관학과 유식학도 나란다 대학에서 

나온 것이다.


현장은 중국으로 돌아오면서 

엄청난 양의 경전을 가져왔는데

그는 평생 불경 번역에 매달렸다.

그의 제자 중 신라 출신 원측이 있다.

원측(613~696)은 신라 왕족 출신으로

어려서 출가하여 당나라로 가서 

현장 법사의 역경 사업을 도왔으며

중국 불교계에 매우 커다란 업적을 남긴다.


현장이 인도를 다녀온 이후에 

신라의 혜초(704~787) 스님이 인도에 다녀와서

<왕오천축국전>이라는 여행기를 남겼다.


혜초 스님은 인도로 갈 때에는 배편을 이용하였다.

중국 광주에서 수마트라를 거쳐

동인도에 도착하는 경로였다. 

그는 인도의 여러 불교 성지를 순례하고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이란,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을 거쳐

북쪽 루트로 중국으로 돌아왔다.

발로 걸어서 이루어 낸 경이로운

구도 여행이 아닐 수 없다.


남천축국 여행 중에

고향을 그리는 그의 마음이 

아래 시에 잘 담겨 있다.


달 밤에 고향길 바라보니,

뜬 구름이 바람에 흘러가네.

그 편에 편지라도 부쳐보려 해도,

급한 바람은 듣지 않고 가버리네.

내 나라는 하늘 끝 북쪽에 있고

남의 나라는 서쪽 구석에 있네.

해 뜨거운 남쪽에는 기러기마저 없으니

누가 계림으로 날아가리.



나란다 사원에서 수학한 중국 승려

의정(633~713)이 쓴 <대당서역구법고승전>에는

대학에서 공부하던 신라 스님들 이야기가 나온다.

아리야발마와 혜업 스님이 그들인데

두 스님 모두 귀국하지 못하고

나란다 사원에서 구도자의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이름 모를 신라의 두 스님도 귀국하던 중

병에 걸려 임종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 외에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타클라마칸 사막이나 파미르 고원에서

입적한 신라 스님들이 있었을 것이다.

불교 윤회의 교리대로라면

그것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있다. 

다시 태어나면 되니까.




신라와 티베트


신라가 티베트보다 불교가 먼저 들어왔다.

두 나라 다 같은 나란다 대학으로부터 

불교가 전해진다.

그러나 티베트 불교는 다르다.

티베트 불교가 전해질 당시 바로 전에

요기(요가 수행자) 틸로파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의 제자 나로파가 가진 지식과 편견을

온갖 시련을 통하여 하나하나 벗겨버린다.

12년간의 가혹한 가르침을 통하여

나로파는 마침내 지혜의 눈이 열린다.

티베트 불교는 나로파에 의해

대승 불교 이론과 요가 수행법이 전해졌기에

나란다 대학의 대승 불교 이론만 전해진

당나라와 신라와는 다른 것이다.

이것은 결과 면에서 실로 큰 차이가 나게 된다.




티베트 종교 음악


한국의 고유 전통문화 중

바라춤이나 승무와 북과 목어와 탱화 등 불교를 통해

전해 내려오는 것들이 있다.

그 품격은 참으로 놀라운 예술성을 가진 것들이다.

예불 전에 새벽을 가르고 울리는 목어를 치는

리듬과 소리의 담박함은

평생 잊지 못하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것들은 태고종을 통해 면면이 이어져 왔다.

그 뿌리는 또한 티베트 불교에 있다.



티베탄 저음 독송 의식

티베탄 주음악은

사원의 승려들의 수행 음악으로 존재한다.

소리 자체가 영적 통로라 여기기에 

그들에게는 신성한 것이다.


1959년 제14대 달라이 라마가 인도로 망명하여

인도 북부 '다람살라'에 망명정부를 수립한 후,

상당수의 티베트 불교 승려들과 신자들은

티베트를 떠나 라다크를 포함한

남아시아 지역으로 흩어져 난민 공동체를 구성했다.


라다크에는 수천 종류 이상의 독송이

행해진다고 알려져 있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일곱 종류의 독송 의식이

유네스코 세계 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이들 독송 의식은 티베트 불교의 4대 종파인

닝마(Nyngma)·카규(Kagyud)·샤캬(Shakya)·

겔룩(Geluk)파에서 행해지는 공통 의식,

특정 종파의 의식, 대승불교 의식 등이다.


우선 티베트 불교의 4대 종파 모두에서 연행하는

독송 의식으로는 두 가지가 있다.

그중 하나는 티베트 불교의 주요 경전인

〈구야사마즈 딴뜨라(Guhyasamāja Tantra)〉독송이다.

이 독송은 라마승들이 낮고 깊은 저음으로 영창 하는데,

인간이 낼 수 있는 최대의 저음을 구사한다. 

진동의 울림이 신비로울 뿐 아니라

합창으로 행할 때는 그 장엄함은

상상할 수 있는 이상의 느낌을 준다.



우주 창조는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는데

우주 에너지가 확장되면서 소리를 낸다.

에너지의 파장은

일반적으로 평탄하게 가지만 

에너지의 멈춤은 파동 선을 일으킨다.

중간중간 뭉치는 파동선 부분은 

멈칫하고 다시 평탄해지고를 반복한다.

'옴~'이 그것을 상징하는 것이리라.


그 옴 파동에 동화되는 것은

의식의  초월을 위한 명상에서 중요하다.

그 창조 에너지를 넘어

고요의 세계에 들 수 있기 때문으로 사료된다.




티베탄 볼

울림이 좋은 도구로는 종이 있다.

그러나 손쉬운 가깝게 사용할 수 있는 악기는

티베탄 볼이 있다.

이 악기의 크기나 두께나 형태에 따라 

여러 음이 구사되리라.

맑은 고음 파동으로는

최고의 악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혜초의 인도 기행문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 1908년 프랑스의 동양학자인 펠리오에 의해 중국 간쑤성의 둔황 막고굴에서 발견되어, 고대의 동서 교섭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는다.




https://youtu.be/W5frZkehX7M?t=234





https://youtu.be/TAESZsLJdVw?t=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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