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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희 Nov 14. 2022

파키스탄 1

화가의 심미안과 통찰력으로 본  <핵심 미술 이야기>

화가의 심미안과 통찰력으로 본

<핵심 미술 이야기>




근대부터의 중동 상황 


전쟁에 휩싸인

중동의 나라들 11

파키스탄 1


라호르의 바드샤히 모스크




'파키스탄'이라는 단어의 '파키'는 

페르시아어로 '순수함', 

혹은 '청정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스탄'은 페르시아어로 '풍요로운 곳', 

혹은 '모든 것이 넘치는 곳'이다.

그러므로 '파키스탄'이라는 국명은 

'순수함이 넘치는 땅'이라는 뜻이 된다.


파키스탄 이슬람 공화국(약칭 파키스탄)은 

남아시아에 위치한 국가이다. 

인구는 약 2억 2천 오백만 명(2021년)으로 

세계에서 5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라이다. 

무슬림의 수는 세계에서 2번째로 많다. 


파키스탄의 땅은 인더스 문명들의 발원지로, 

8,500년이 넘은 신석기 유적이 발굴된 곳이고

아리안족이 내려와 베다 경전을 남긴

유서 깊은 땅이다.

근대기에는 영국 동인도회사의 지배를 받았고 

1858년부터 1947년까지는 

인도 제국으로 묶여 영국의 통치를 받았다.


1947년 마침내 영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이루어냈다.

다만 이 과정에서 

힌두교가 주축이던 인도와, 

이슬람교가 주축이던 파키스탄이 

서로 분리독립을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강제로 이주하거나 

살해당하는 대규모 디아스포라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1971년에는 동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이후 

방글라데시로 새롭게 탄생하였다. 

파키스탄은 이후 약 40여 년 동안 

속세 주의와 이슬람 극단주의가 공존하는 

굉장히 미묘한 사회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파키스탄은 현재 6번째로 

거대한 규모의 군대를 갖추고 있으며, 

핵보유국이며 핵무기를 다량 보유하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개발도상국에 속하며, 

심각한 사회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고심하고 있다. 




베다 문명 발생지


인더스 문명 이후인 

기원전 1500년부터 기원전 500년까지는 

인도-아리아 문명이 번성하였으며, 

이 시기를 베다 시대라고 부른다. 

이 시대를 ‘베다 시대’라고 일컫는 이유는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힌두교 최고의 경전인 

베다가 이 시기에 작성되었기 때문이다. 

힌두교의 근간인 베다는

경전 외에 수행법인 요가 체계를 통해

지금까지도 온전히 전해 내려와

인류에 공헌하기에

가장 완벽한 종교라고 생각하게 된다.


당시 베다 문명은 

기원전 1000년 경에 세워진 

펀자브 지방의 탁실라에서 

그 번영의 정점을 찍었으며, 

기원전 519년 경에는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제국이 등장하며

사그라든다.


그 후 기원전 326년에는 

알렉산더 대왕이 다스린 헬레니즘 제국이 

그리고 이후에는 마우리아 제국, 

이때 가장 번영한 지방이었던 탁실라는 

세계에서도 가장 이른 시기에 대학을 지었으며, 

기원전 6세기에 이미 대학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489년에서 632년까지 번성한 

신드 주의 라이 왕조는 

그 국력의 전성기 시절에 파키스탄 지역을 다스렸다. 

또한 마지막 불교 제국이었던 팔라 왕조는 

다르마팔라 왕과 데바팔라 왕 시절에 

남아시아 쪽으로 활발한 정복 사업을 전개하여 

북인도를 거쳐 현재의 방글라데시 지방까지 정복하였다.




이슬람 제국


711년 경에는 아랍에서 건너온 

무슬림 정복자인 무하마드 빈 카심이 

신드 지방을 정복하였다.

중세 초기인 642년 경부터 1219년 경까지 

파키스탄 지방에는 점차 이슬람교가 

뿌리 깊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이후 기원전 975년부터 1187년까지

존속한 가즈나 제국, 샨사브 왕국,

1206년부터 1526년까지 존속한 

델리 술탄조 등이 있다. 

또한 델리 술탄조의 마지막 왕조였던 

로디 왕조를 몰아내고 인도를 정복한 

무굴 제국 또한 무슬림 제국이었다.




영국의 침략기


1526년에 건국된 무굴 제국은 

이후 인도를 대부분 정복하면서 

페르시아 문화를 널리 퍼뜨려나갔고, 

이로 인하여 파키스탄 지방에도 

인도-페르시아 문화가 성립되기 시작하였다. 


무굴 제국 시대에 파키스탄 지역의 대도시로는 

라호르와 타타 등이 있었으며, 

이 도시들에는 웅장한 무굴 제국 시절의 건물들이 

매우 많은 편이다. 

18세기 초부터는 점차 서구 열강들이 

인도로 침입해 들어오며 

무굴 제국이 망해가기 시작하자 

점차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운 상태에 빠지게 된다.

전 세계적으로 식민주의의 광풍이 불던

18세기경, 영국 동인도회사는 

파키스탄의 해안선 지역에 

여러 무역기지들을 설치하였으며, 

영국은 상선들을 보호하고 

경제적 자유를 지켜낸다는 구실로 

이 기지들에 군대를 파견하면서 

점차 파키스탄 지역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동인도회사는 

1765년에는 다른 서구 경쟁자들을 몰아내고 

인도 아대륙 전부를 차지하는 데에 성공하였으며, 

나중에는 벵골 지역도 점령하고 

군대를 통한 통제력을 대폭 강화하면서 

1820년 경에는 인도와 파키스탄 등지에 이르는 

광대한 유역의 영토를 차지하였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이때부터를 파키스탄의 식민기의 시작으로 본다.

이 시기의 파키스탄은 영국의 사실상 지배를 받았으며, 

동인도회사는 단순히 경제적, 정치적 동화뿐만 아니라 

교육, 사회, 문화적으로도 현지인 탄압과 동시에 

대대적인 동화 작업을 벌이면서 

파키스탄 사회에 격랑을 불어넣었다.

가장 대표적으로 

1835년의 영국 교육법, 인도 시민법 등이 있다. 

한편 영국이 자체적인 서구식 학교들을 세우며 

서구화 정책을 펼치기 시작하자, 

본래 인도에서 교육을 담당하던, 

서당과 비슷한 교육기관이었던 ‘마드라사’는 

영국의 지원을 받지 못했고, 

이때 많은 수의 마드라사들이 강제로 문을 닫았다.




식민기


18세기 들어 무굴 제국이 고질적인 부정부패와 

서구 열강들의 침입으로 망조가 들어가자, 

파키스탄 펀자브 지방의 시크 제국이 

일시적으로 그 틈을 타서 상당히 거대한 영토를 정복, 

다스리는 데에 성공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인도 전역의 확고한 지배권을 노리던 

영국 동인도회사가 쳐들어오자 멸망하고 말았다. 

1857년에는 벵골 지방에서 빅토리아 여왕과 


 한편 영국은 효율적인 통치를 위하여 

현지인들 사이의 갈등을 증폭시켜 

함부로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는 

전술을 사용하였는데, 

인도의 가장 대표적인 두 이질 집단이었던 

힌두교도들과 무슬림들에게 

이 전술을 매우 효과적으로 활용하였다. 

영국은 이 두 집단 사이의 종교적 갈등을 

대거 불러일으켰고, 

언어적, 민족적, 종교적으로 판이했던 인도는 

갈수록 분열을 거듭하고야 만다. 

한편 힌두교도 지식인들은 

힌두 전통으로 회귀하자는 내용의 

‘힌두 르네상스’를 불러일으켰고, 

이를 통하여 영국령 인도에서 

더 큰 사회적 권력을 얻고자 하였다. 

한편 무슬림 지식인들은 이에 맞서고 

수적 열세를 이겨내기 위하여 

아예 2개의 국가로 나누어 갈라서자는 주장까지 펼쳤고 

1906년에는 전인도 무슬림연맹을 창설하여 

무슬림 세력을 결집하였다. 

당시 힌두교도들의 주축 세력이었던 

인도 국민회의가 반영 투쟁을 벌이며 

인도 독립을 외쳤던 것과는 달리, 

무슬림 세력들은 

상대적으로 친영적인 목소리를 띠었으며 

영국적 민주주의, 의회제도 등을 받아들이고자 하였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힌두교도 중심으로 수백만 명이 결집한

대대적인 시민 불복종 운동이 일어나 

영국에 대항하기도 했다.

한편 인도 정계가 힌두교도들에 의하여 장악당하고, 

무슬림 세력의 목소리가 갈수록 묻혀가자, 

1937년과 1939년 사이에 

당시 무슬림 지도자였던 무함마드 알리 진나가 

2 국가 독립론을 활발히 띄우기 시작하였다. 

2차 세계대전 동안 인도 내 무슬림 세력은 

영국을 지지하였으며, 

이를 통하여 2 국가 독립론을 

영국에게 적극적으로 표명하였고 

점차 힌두교를 믿는 인도 제국의 나머지 지방들과는 

멀어져만 갔다.





파키스탄의 국부인 무함마드 알리 진나




파키스탄의 독립


1946년에는

영국이 인도를 독립시키기 위하여

인도와 파키스탄 지방에서 총선거를 실시하여

독립, 자치적인 의회를 구성하도록 만들었다.

이 선거에서 무슬림 연맹은

무슬림들에게 할당된 의석수 가운데

90%를 휩쓸었으며,

이로 인하여 파키스탄의 분리 독립을 외치던

무슬림 연맹의 목소리가 나날로 커져갔다.

무슬림 연맹이

인도 내 무슬림들의 단일 대변자임을 부정하던

인도 국민회의조차도 어쩔 수 없이

무슬림 연맹을 동등한 협상자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영국도

인도의 모든 무슬림들을 대표한다는 것을 천명한

무함마드 알리 진나와

그의 2 국가 독립론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를 2개로 나뉘어 독립시키고 싶지 않던 영국은

‘내각 작전(Cabinet Misson Plan)'을 통하여

인도와 파키스탄을 묶기 위한 최후의 노력을 하기도 했다.

영국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내각 작전이 수포로 돌아가자,

1947년에 영국이

인도 식민지를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할 독립시킨다는 것을 승인하면서

마침내 1947년 8월 14일에 파키스탄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다.




독립 후 혼란기


한편 인도와 파키스탄에 걸쳐 있던 

펀자브 지방에서는, 

분할 독립이 선포되자마자 

힌두교도들과 무슬림 사이에서 

격렬한 충돌이 일어났다. 

대략 20만 명에서 200만 명 사이에 달하는 사람들이 

종교 갈등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과정에서 5만 명에 달하는 무슬림 여성들이 

힌두교도와 시크교도들에게 납치되거나 

강간당했으며, 

3만 3천 명의 힌두교도 여인들 또한 

무슬림들에 의하여 같은 일을 당했다. 

이후 대대적인 이주가 일어났고, 

650만 명에 달하는 무슬림들이 

인도에서 파키스탄으로 이주하였으며 

470만 명에 달하는 힌두교도들과 시크교도들이 

파키스탄에서 인도로 피난을 갔다. 

이는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집단 이주 사건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잠무-카슈미르 지방에 대한 

영유권 문제가 발생하였고, 

이 영유권 문제와 해묵은 종교 갈등 문제가 

복합적으로 얽히면서 

결국 1947년에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1947년에 독립을 이룬 직후, 

무슬림 연맹의 지도자였던 무함마드 알리 진나는 

파키스탄의 첫 총독으로 부임하였으며, 

파키스탄 의회의 대변인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은 

1948년 9월 11일에 결핵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방글라데시 독립


파키스탄은 1965년에 

인도와 2차로 전쟁을 벌이기 전까지

상당한 경제 성장을 이룩했으나,

전쟁 직후에 급격한 경제 불황을 겪었으며 

이에 실망한 국민들로 인하여 

1967년에는 대규모 시위도 일어났다.


1970년에는 

독립 이래 첫 민주적인 선거가 열렸으며, 

군부 독재에서 민주정으로 변화가 

진행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동파키스탄 지역에서 

지역정당인 아와미 연맹이 승리를 거두자, 

아히야 칸 대통령과 군부는 

권력을 승계해 주기를 거부하였고, 

서치라이트 작전을 펼치며 

대대적인 무력 탄압을 시도하였다. 

이로 인하여 동파키스탄 지역에서는 

대대적인 소요가 일어났고, 

결국 대대적인 내전이 터지고 말았다. 

이 내전을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이라고 칭하는데, 

이 전쟁에서 벵골 군대가 

파키스탄 군대에게 승리를 거두면서 

동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라는 국명으로 

파키스탄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데에 성공하였다. 

이 전쟁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수는 

대략 30만 명에서 50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한편 파키스탄과 앙숙이던 인도가 

동파키스탄의 독립을 돕고자 물자 등을 지원하자 

파키스탄이 육해군을 동원하여 

인도를 선제공격하였고, 

이 전쟁에서 파키스탄이 인도에게 패전하면서 

결국 동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로 떨어져 나가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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