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의 심미안과 통찰력으로 본 <핵심 미술 이야기>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 중 창의문, 겸재 정선
장동팔경첩은
국립박물관본과 간송미술관본이
겹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다른 부분이 있다.
간송미술관본에는
장동 밖 창의문 계곡 풍경이 들어가 있다.
위의 창의문 그림은
배경에 백악이 왼쪽에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부암동 쪽에서 창의문을 바라보는 구도이다.
경사가 급하고 휘어진 험한 길이다.
겸재는 현재의 모습으로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창의문 밖 풍경을
우리에게 남겨줬다.
계곡 가운데로 몰려있는
각종 크기의 바위들의 구성 자체가 흥미롭고
그 사이에 구불구불 계단 길도
상세히도 묘사하고 있다.
그림 상부 삼 분의 일을 가리고 보면
완전 현대판 모던한 추상화와 진배없다.
선을 따라 창의문 아래도 이어지는
길의 흐름을 유심히 보노라면
눈동자의 움직임이 음률을
갖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다 멈칫하며 다시 가고
빠르게 가다가 살짝 틀며 회전하여 계속 가고,
강 약 중간 약...
마치 계곡 물이
바위를 휘돌아 스쳐 가듯 말이다.
창의문을 자하동에 있기에
자하문이라 부른다고
앞서 얘기한 바 있다.
한양의 사대문 안 입장에서
자하문 밖에 있는 동네를
'자하문 밖'이라고 했다.
발음을 빨리 하다 보니
'하'가 생략되어 '자문 밖'이 되었다.
자하문 밖 > 자문 밖
자문 밖 옛 지명은
인왕산 쪽 '앞골'과 백악 쪽 '뒷골'이 남아 있다.
골이 깊어 음습한 분위기의 동네이지만
경치만은 빼어난 곳이다.
민간 신앙에
전통으로 내려오는 것 중에
대상에 기도하는 행위를
치성을 드린다고 한다.
어떠한 염원이든 사람마다 틀리겠지만
기원을 드리는 일은
이루어지고 아니고 를 떠나
정신적으로 위안을 주기에
중요하다 하겠다.
그 치성을 드리는 대상이
하늘, 고목, 바위 등이 대표적이다.
바위를 대상으로 할 경우,
바위 표면을 작은 돌로 갈아내
파이게 된 면에 작은 돌을 붙이면
기도가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런 바위를 바위에 돌을 붙인다 하여
붙임 바위로 불리다가
발음 편의 상 부침 바위가 되었다.
서울 창의문 너머 부침 바위가 있었고
부침 바위는 지명이 되었으며,
부침의 앞 머리글자 '부'만 따고
바위는 바위 '암'자로
한자를 차용해 '부암동'이 되었다.
붙임바위 > 부침바위 > 부암ㅡ> 부암동(府岩洞)
지금의 하림각 건너 개울가에 있던
부침바위는 이정표 역할도 했으니
서울서 자하문 고개를 넘어
가파른 언덕을 넘어와
부침 바위를 보고
오른쪽으로 돌아올라가
낮은 조소고개를 넘으면 바로
왼쪽은 세검정이요,
오른쪽은 내가 돌아 나가는
양지바른 초가 마을이 나왔으리라.
초가마을에서
왼쪽 내를 따라 오르면 북한산이요
초가마을 오른쪽 폭포 위쪽이
백사 이항복의 별장터인 백사실이다.
부암동 일대는 경치가 빼어나
예부터 고관대작 세도가의 별서지로
안평대군의 별서 무계정사(武溪精舍)터(무계원)와
흥선대원군 별서(석파정)가 남아 있다.
어릴 때 기억으로는
무계정사 전 골목 인왕산 능선에 올라가면
앵두밭 투성이었다.
배부를 정도로 따 먹었던 곳이다.
도성 밖 가까이 과수원은
도심에 신선한 과일을 공급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래서 세검정과 구기터널 일대
언덕에 과수원이 많았다.
구기터널 전 오른쪽 능선에는
복숭아 과수원이 있었는데
꽃 필 때면 하도 보기 좋아
한참을 팔베개하고 누워 있었다.
부암동에 있었던 부침바위
몽유도원도, 안견, 1447년
세종대왕의 3남이자
세조의 손아래 동생이었던
조선 4대 명필인 안평대군 이용은
서예로 중국에서까지도 유명했으며,
조선 역대로 이광사를 제외하곤
견줄 이가 없는 명필이다.
안평대군은 꿈에서 본 '무릉도원'을
당대 최고의 화가 안견에게
주문해 그리게 해서 나온 작품이
'몽유도원도'이다.
몽유도원도 제목과 발문에는
안평대군 행서로 된 친필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이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남은
안평대군 친필로 역사적 가치가 엄청나다.
그의 서체는 조선 시대 내내 유행했던
송설 조맹부체(송설체)이지만,
힘에 있어서는 조맹부를 능가한다고 본다.
반면,
불세출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몽유도원도가 아쉬운 것은
너무도 테크닉컬한 작품이라는 점이다.
그 테크닉은
동양미술사적으로 보자면,
북종화의 대가인
북송 말기의 곽희 화풍이다.
곽희 화풍이 원나라를 거쳐
조선 초까지 유행했음을 알 수 있다.
곽희는 실제 하지 않은 상상의 영역을
그림에 반영해
개성 있는 그림을 완성한 것은
인정되어 마땅하나
그 화풍을 추종해 온 작가의 작가 정신은
온전하다 할 수는 없겠다.
테크닉 면에서 개성이 아닌 모작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테크니컬한 작가들의 특성은
심성이 가볍다는 점일 것이다.
실지로 안평과 안견 사이에 문제가 발생해
안견이 안평에게 의절당했는데
안견이 안평의 좋은 벼루를 훔쳐서이다.
몽유도원도는
가로로 긴 두루마리 두 개로 구성됐어 있다.
길이는 각각 11.2M, 8.57M이며
그림 부분은 38.6×106.2cm이다.
다만, 곽희 화풍으로 가로로 긴 작품은
중국에서도 보기 드문 작품인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겠다.
조선 시대 파라다이스의 세계를
3일 만에 붓으로 그려낸 몽유도원도는
지난 400여 년간 일본에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시마즈 요시히로가
찬탈해 갔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후 일본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아
중요문화재 회화 제1152호로 지정돼 있었다.
몽유도원도가 2022년도에
영구적으로 한국에 반환될 수 있었던 것은
ECI와 ㈜대승의 역할이 큰 것으로 전해진다.
나라에서 명분 상 하기 껄끄러운 일을
개인이나 단체나 회사 차원에서
할 수 있다는 사례라 할 수 있겠다.
안평대군은
몽유도원도와 풍경이 비슷한 곳으로
북한산을 꼽았다.
북한산이 환히 다 보이는 계곡 밑에
무계정사(武溪精舍)라는 별장을 짓고
집현전 학자들과 교우하며
글을 읽고 활을 쏘며 지냈다 하니,
부암동은 조선 초 최고의 예술과
풍류의 문화 살롱이었던 셈이다.
개인적으로는 북한산이
무릉도원이나 몽유도원도와
유사한 경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북한산 경치는 부암동보다
북악산 북쪽 팔각정에서 보는 경치가
더 근접하고 파노라믹 하다 하겠다.
북악산 북쪽 팔각정에서 본 북한산
대원군 별서(별장)는 석파정으로 불린다
대원군의 호를 딴 석파정이라는
정자가 있기는 하지만,
전체 가옥들과 정원을 포함하기에
'흥선대원군 별서'로 부르는 것이 맞다.
흥선대원군 별서는
원래는 안동(장동) 김씨 세도가의 일원으로서
철종 때 영의정을 지냈던
김흥근의 별서 '삼계동정사(三溪洞精舍)'이었다.
안동 김씨 세도가를 꺾고 집권한 흥선대원군은
세도가의 핵심 인물이었던 김흥근의
경치 좋은 삼계동정사를 자신이 차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김흥근이 순순히 내줄 리 만무했기 때문에
흥선대원군은 한 가지 묘수를 고안해 냈다.
바로 자신의 아들인 고종을
삼계동정사에 행차하게 한 다음
하루 자고 가게 한 것.
조선의 관례에 따르면
임금이 하루라도 머문 장소는
일종의 불가침 장소가 되어서
감히 신하가 머물 수 없었고,
결국 김흥근은 눈뜨고 흥선대원군에게
삼계동정사를 넘길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이때 별장 주변의 장엄한 바위에 감탄한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호를 '석파(石坡)'로 짓고
별서의 이름도 '석파정(石坡亭)'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흥선대원군 별서
청나라풍 정자, 석파정
너럭바위
석파정에서 가장 구석진 곳에 있는 바위이다.
굉장히 우람하고 위압적인 바위로,
코끼리와 닮았다 하여
코끼리 바위로 불리기도 한다.
인왕산의 영험한 기운을 담고 있다 하여
예전부터 서울 내 치성 장소로
인기를 끌었던 곳이다.
흥선대원군 별서에 딸린 사랑채, 석파정 별당
석파정 별당 건물은
원래 흥선대원군 별서 내에 같이 있었으나
1958년에 서예가 손재형이
홍지동 세검정 삼거리에 있는
자신의 집 바로 위인 현재 자리로 옮겼고,
작품 활동을 하는 장소로 활용했다.
1993년에는 한정식당 석파랑(石坡廊)으로 바뀌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한 때, 세검정 근처에 살 때
간혹 지인들과 식사하러 가곤 했는데
맛집이라 할 수는 없다.
별당 건물은 전반적으로 청나라풍이 나며,
조선 후기 상류층들의 별장 양식 특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건물이다.
가운데에 대청이 있고
양 옆으로 온돌방이 있는 형태이다.
앞으로 돌출된 방은
흥선대원군이 주로 사용했던 방이고,
대청은 그 유명한 난초 그릴 때 쓰던 곳이며,
건너방은 손님을 대접할 때
활용했던 방이라고 한다.
마루 안쪽에는 난간을 설치해
고급스런 느낌을 자아내게 했다.
흥선대원군 난초
흥선대원군은 난으로 유명했다.
그의 난 그림의 특징은
줄기가 두툼하고
끝이 유독 가늘게 길다는 것이다.
그림으로 그린 사람의 성품도 파악되는데
그의 그림으로 미루어 보아
얼마나 꼬장꼬장한 성격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겠다.
학창 시절,
인사동이 거의 골동품 가게였었다.
그때만 해도 대원군 난이나 이광사 습작들을
뭉테기로 쌓아놓고 5만 원 씩에 팔았다.
물론 낙관은 없었으나
동양화를 공부하는 덕에
어린 눈에도 진품인 줄은 구분할 수 있었다.
가게에 그렇게 많은 양의 습작이 나왔다는 것은
그 둘이 얼마나 지속적으로 열심으로
익혔는 지를 가늠하게 해 준다.
'오성과 한음' 이야기에
오성은
이항복(白沙 李恒福, 1556 ~ 1618)의
아명이고
한음은
이덕형의 아명이다.
이들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왜군을 물리치는 데 큰 활약을 했으며,
이항복과 이덕형 모두
조선 최고의 벼슬인 영의정에 올랐다.
이항복의 별서 터는
자문 밖 북악산 서쪽 계곡 끝자락
세검정 정자 근처에
'백사실'이라는 곳이다.
백사는 이항복의 호이다.
조선 중 후반기 별서의 전형을 보여주는
소쇄원보다 지형적으로 한 수 위인 곳이다.
집터나 별서 터로 미루어 보아
이항복의 택지에 대한 안목을
인정 안 할 수 없다.
백사실 터 역시
어러서의 추억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작은 아버지 신혼집이 백사실 밑
폭포 옆 초가 마을에 있어서
자주 가서 보내곤 했다.
그때 두꺼운 황토 벽돌 초가집의 추억은
삶 내내 나의 자연적 예술 감각의 지표가 되었다.
초등학교 6학년 겨울에
세검정 근처로 이사 가서
겨울에 백사실에 작고 둥근 아담한 연못에서
스케이트를 탔었던 추억도 있다.
서촌 살 때는 경복궁 경회루에서 겨울마다
스케이트를 탔기에 그보다 장소는 작았지만
숲 속에서의 스케이트 타기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백사실 들어가기 직전에 있는 폭포
백사실 들어가는
평탄하고 좁은 입구 길
백사실 터
백사실 연못과 정자 터 주춧돌
피톤치드가 보이는 듯한 연못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