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박물관장과 국립박물관장을 지낸 삼불 김원룡 선생은 한국 고고 미술사 분야의 개척자이다. 한국의 미를 '자연미'라는 용어로 압축해서 특징지으신 분이다.
건축이란 땅 위에 몸이 생존을 위해 기거할 장소를 말함이다. 넓은 땅에 비하면 건축이 지어지는 면적은 극히 작다. 이는 곧 자연 속에 건축이 들어간다는 얘기이다.
사람이 많아져 도시가 되어서는 건축이 다닥다닥 붙어 있게 된다. 한옥은 그 도시형 주거공간에서도 중정을 만들어 자연을 끌어들인다. 이것이 서양과 틀린 점이라 하겠다.
한국 문화에 있어 자연미라 함은
환경적 자연만을 의미하는 하는 것이 아닌
'자연스러움'의 의미도
함축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야 제대로 해석될
한국 문화가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태견에서 앞발을 내민 자세의 발을
'비정비팔(非正非八)'로 해야 한다고 한다.
이 의미는 정확히 90°도 아니고
45°도 아닌 자연스러운 각도이다.
그밖에 각 자세들이
어떤 것이 바른 자세인지 모를 때는
자연스러운 자세가 정답인 것이다.
건축에서도 건축물마다
다른 상황이 발생하는데
그때 대목장은 자연스러운 것을 택한다.
원림(園林)과 원(苑)
원림은 예부터 집 안팎의 조경을 뜻하는 단어로 쓰였다. 한옥 가까이 뜰(園)과 경계 넘어 수풀(林) 모두를 아우르는 자연주의적 개념이다.
원림은 공간을 집안으로 한정하지 않고 집터에 딸린 숲이나 계류, 계곡까지 공간을 확대한다. 담 또는 인공 너머 자연을 그대로 정원으로 끌어들이려는 생각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원림은 주어진 지구 환경에 자연과 사람은 상생해서 살아야 한다는 개념이 들어 있다. 이렇기 때문에 자연을 함부로 해하거나 도려내거나 오리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자연에 대한 태도로 중국과 일본, 한국의 정원에서 차이가 드러난다. 자연을 함부로 해하여 완전히 해체한 다음 새로운 정원을 꾸미는 것은 중국의 정원이요, 지나치게 오리고 도려내어 전혀 새로운 정원을 만드는 '성형정원'은 일본의 정원이다. 우리의 원림이라는 개념과 많이 동떨어져 있다.
일본 메이지 유신 때 만들어진 정원이란 말이 일제 강점기에 들어와 지금은 '원림'보다 '정원'이 많이 쓰이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에서는 정원(庭園)은 예전에 일본에서 이식된 단어로 보고 이제는 정원(庭苑)으로 쓰고 있다.
苑은 나라 동산 苑이므로 궁원의 경우, 창덕궁 궁원을 말할 때 비원(秘苑), 후원(後苑), 북원(北苑), 금원(禁苑)으로 모두 원(苑)을 쓰고 있는 것은 맞다. 그러나 정원(庭園)을 정원(庭苑)으로 한문 한 자만 바꾸어서 해결된다는 생각 자체가 더 문제 있다고 본다. 눈 가리고 아옹하겠다는 것 아닌가 말이다. 그냥 '정원'대신 '원림' 사용을 장려하는 것이 답이라고 본다.
이러한 한국의 자연미가 가장 잘 느껴지는 궁궐은 창덕궁이다. 한국 건축 자연미로 특징 지울 수 있는 한국적 조경인 '원림'이 가장 잘 구현되어서 일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효종 편이나 다산 시문집에 '원림'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화계(花階)
살림집이나 궁궐이나 절 등의 집 뜰에 층계 모양으로 단(段)을 만들고 단마다 화초를 심은 시설을 화계라 한다.
창덕궁은 자연을 손상 안 하고 건물 배치를 했고 건물들 뒤의 경사면도 살려서 계단 형태로 화단을 조성했다.
인정전 옆에 선정전이라는 청기와 지붕의 건물이 있다. 임금의 실지 업무는 선정전에서 봤다 한다. 선정전 뒤에도 널찍하고 시원한 맛이 나는 화계(꽃 계단)가 있다.
반면 왕비의 거처인 대조전의 화계는 규모가 있으면서도 화계와 건물의 사이가 좁다. 대조전 뒤 난간에서도 꽃을 가까이 볼 수 있게 배려해서 조성된 것이리라. 일반인이나 사대부들과는 달리 늘 궁궐에서만 생활하는 왕가 사람들에게는 이 화계가 정서적으로 무척이나 중요한 것이었으리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기에 가장 신경 써서 하나하나 조성했을 것이고 격이 있는 한국미의 정수가 숨어있다고 본다.
창덕궁 대조전의 화계는 폭이 크고 시원은 하나 아기자기한 맛은 경복궁의 교태전 뒤 화계가 더 있다.
창덕궁 선정전 뒤 화계
창덕궁 대조전 뒤 화계
2. 무심의 미
근대 최초의 미학자는
고려청자를 정리해 책을 낸
고유섭 선생이다.
그는 한국의 미를 정의하기를 어려워했지만,
무심을 언급했다.
장식의 제작 과정을 생각해 보면
보다 쉽게 감상할 여지가 있다.
조선에는 의궤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요즘 말로 프로젝트 플랜이다.
어떠한 국가적인 행사나 일거리가 있을 때
일을 주관하는 사람은
관계되는 사람들을 모아
플랜을 짤 것이다.
화계 장식의 경우에는
조선이 펼치고자 하는
사상이나 기존 양식을
궁중 작가들에게 지시하고
작가는 그 기준을 갖고 의궤를 제작한다.
이렇듯 분화된 시스템에서 작업을 했기에
내용은 왕조에서 나왔고
밑그림은 궁중 작가의 작품이며
작업은 쟁이의 몫이었다.
그 의궤에 맞추어 쟁이들은 작업에 들어간다.
그 시대의 쟁이들의 제작 기준은
자기의 이름이 드러나지 않으니
천업이려니 하고 작업을 했고
그러기에 딱히 완벽할 필요는 없었지 싶다.
정해진 형식과 밑그림이 있어서
그 안에서 자유롭게 제작해도 되었다.
그런 면에서 이름을 걸고 작업해야 하는
화공들의 작품 하고는 다른 각도에서 봐야 한다.
작업의 마무리에 있어서
쟁이가 제작에 있어 자유로웠기에
더도 덜도 아닌 무심하게 만든 듯한
가장 한국적인 느낌이 날 수 있었으리라.
보기에는 아동화 같으나
그 시대의 수수한 심성이 있는 어른이 아니면
나오지 않는 뭔가가 있다.
화계 안의 굴뚝과 화계를 두른 담장의 장식이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어 오기도 했다. 70년대 말 80년대 초에는 담장을 인상파 식으로 잘 그리면 국전에 대통령상도 받던 시절이다. 그리고 이화여대 미대 남계 이규선 교수가 담장 사진으로 탁상용 캘린더를 내서 참 인상적으로 본 기억이 있다. 화계의 장식에 영향받아 작품을 하는 최근 작가들도 있다.
아미산 굴뚝
경복궁 아미산 굴뚝은 왕비의 생활공간인 교태전 온돌방 밑을 통과하여 연기가 나가는 굴뚝으로, 지금 남아 있는 것은 고종 3년(1866) 경복궁을 다시 지으면서 새로 만든 것이다. 현재 4개의 굴뚝이 화계 위에 서 있는데 6 각형으로 된 굴뚝 벽에는 덩굴무늬, 학, 박쥐, 봉황, 소나무, 매화, 국화, 불로초, 바위, 새, 사슴 따위의 무늬를 조화롭게 배치하였다. 각 무늬는 벽돌을 구워 배열하고 그 사이에는 회를 발라 면을 구성하였다.
장수를 바라는 십장생, 부귀를 상징하는 무늬, 군자 품격의 상징 대나무, 화마와 악귀를 막는 상서로운 짐승들이 표현되어 있다. 굴뚝의 위쪽 부분은 목조건물의 형태를 모방하였고 그 위로 연기가 빠지는 작은 창을 설치하였다. 굴뚝의 기능을 충실히 하면서 각종 문양 형태와 그 구성이 매우 아름다워 궁궐 후원 장식 조형물로서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내용이나 표현법에 있어서 민화와 일맥상통함도 엿볼 수 있다.
꽃담
한옥(韓屋)의 담을 보면 담을 쌓을 당시 그 집안의 사정을 알 수 있다. 자식이 부족한 집에는 다산(多産)을 기원하는 포도 무늬를, 즐거움이 가득하길 바라는 집에는 囍(희) 자를 넣으면서 그 속에 축복의 마음을 담았다.
무늬로 장식한 담을 꽃담이라 한다. 꽃무늬가 들어가서 꽃담이 아니라 꽃처럼 아름다운 담, 우리의 마음이 담긴 담이다.
꽃담을 화문장(花文墻)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화문장은 대륙의 상위계층 집에서 집안을 가리기 위해 쌓은 담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나라의 꽃담은 화문장과 다르기에 1980년대 이화여자대학교 도예과 조정현 교수가 ‘꽃담’이라는 용어를 만든 후 널리 쓰고 있다.
경복궁 자경전의 꽃담은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수준이다. 건물 로비에 비싼 대리석으로 서양식 장식을 하기보다는 한국적인 꽃담 장식으로 벽면을 채우면 훌륭한 장식이 될 것이다. 그런 것이 한국의 미를 살릴 수 있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