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 예술가
핵심 예술가
홍콩 - 왕가위
[ 의식 전환 ]
지난 20세기 동안 잠재의식을 비롯해
양자물리학의 새로운 연구가 이루어져
진리의 구조가 드러나게 되었다.
진리는 한 차원만이 아니라
여러 의식 차원으로 되어 있다.
그 차원들이 있다는 것과
그들의 구조와 속성을 알면
진리를 찾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은
현재의 삶으로 여기는 물질의식이고
좀 더 관심 있는 사람은
물질의식을 형성하는 잠재의식
그리고
깊은 잠에 빠지는 무의식을 알 것이다.
그럼에도 영감이나 직관의 존재를
체험하기도 한다.
영감이나 직관은 초의식의 영역이다.
여러 의식들이 겹쳐있기에
혼란스러운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지금 인지할 수 있는 의식인
현재의식은 자리가 한 자리밖에 없다.
그 자리에 매 순간
어느 한 의식이 자리를 한다는 것이
의식체계의 속성이다.
왜 그렇게 되어있는지는 누구도 모른다.
속성은 취향이 그렇듯
왜냐고 물을 수 없는 무엇이다.
그리고 현재의식에 어떤 의식을 앉히느냐
하는 선택은 신도 터치할 수 없는
인간의 자유의지이다.
자유는 그만큼 우선적이고 소중한 것이다.
현재의식의 자리에 한 의식에서
다른 의식으로 자리 바꿈을 하는 것을
의식 전환이라 한다.
의식 전환이 있을 때
우리는 각 의식에 따라 영향을 받고
새로움을 느낀다.
지성은 진리라는 성곽의 구조를
파악하게 해주는 보조 수단이다.
지성의 역할은
진리라는 성곽의 안내자이다.
여러 의식은 이성에 의해 알 수도 있지만
감성의 센서는
미묘한 진리의 내부를
감지하기에 더 용이하다.
감정을 극대화시키는 방법은
무슨 일이든 그러하듯
먼저 이완이 되어야 한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마음의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
그러다 보면 무의식으로 들어간다.
우리가 매일 밤 잠에 들기에
매일 겪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재의식에서 이완을 한 후
몰입을 하면 초의식을 앉힐 수 있다.
[감정의 극한 후, 부동의 백지상태]
'화양연화'는 음양 촬영 방식으로
주로 짧게 전반적으로
감정을 끌어올리다가
크라이맥스 부분에선 길게 남과 여를
똑같이 1분씩 찍어 넣었다.
시간을 같게 했다는 것으로
감독의 의도는 간파되었다.
남자는 여자에게 같이 떠나자고 한다.
먼저 남자의 장면은 잔잔한 음악이 깔린다.
그리고 여자는 고민하게 된다.
이어지는 여자의 장면에서는
아무 배경 음악도 대사도 없이
여주인공이 막막히 요동 없이 앉아 있다.
갑자기 정지된 긴 화면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그러다 크로즈 업된 화면이 또 지속되다가
주인공 여자의 눈 밑으로 눈물이 흐른다.
눈물의 정화의식,
이것은 크라이맥스를 의미한다.
인간이 감정의 기복이 들쑥날쑥하다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 직면하면
신체는 눈물이 쏟아냄으로써 순환이 되고
후련함을 느끼며 안정을 되찾는다.
그리고는 여자는 못 떠난다.
소심한 남자가 어렵게 제안을 했지만
수동적인 여자에게
결정을 하게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영화를 보며
마음과 상관없이 감정만으로
신체적인 제약을 받는 경우가 있었는가?
반전이나 그 밖의 기술로
관객을 놀라게 하거나 모독하거나
머리를 백지상태로
만들어 버리는 경우는 많다.
다 관객 스스로 생각을 통해
관객의 마음을 요리하는 수법이다.
그러나,
이 처럼 너무도 길게 느껴지는
1분의 화면 정지 상태로
호흡에 제약을 주어
관객의 생존을 위협하는 영화는 처음이다.
이 처럼,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호흡장애로 얘기하는 영화가 있다.
기법을 구사해서 관객을 집중케 하므로
호흡곤란으로 생존을 위협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감성의 극한의 다다름을 체험케 해주는 것.
그 요소 덕분에 그 상황에서 관객은
잠시 막막한 비어있는 상태를 맛본다.
왕가위란 극도의 센스 가이는
본인의 내부에서 추구하던
예술관을 펴는 데 있어서
잘 나가는 감독 시절인 한참 때에
하고자 하는 것은 최선을 다해서 하고
넘어가야겠다고 결심한 듯하다.
그의 집요한 결심과 결실에 경의를 표한다.
서양의 어는 유명 감독도 해내지 못한 것을
서양 자본이 만들어 놓은 홍콩이라는
도시에서 자란 동양 인간이 해낸 것이다.
<떠나자고 제안한 후, 기다리는 남자>
<제안을 받고 결정을 못하는 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