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건축과 미술 19
사르마트 금관, 1세기, 흑해 연안
사르마트 금관은 신라금관에 비해
약 400~500년 이상 빠르게 제작된 것이다.
이 금관에서 관테 밑으로
추 모양의 장식이 촘촘하게 달려있는 것은
서부 스키타이 여성 신관의
관모 금장식과 같은 형식이고
관테의 위쪽으로
생명수를 상징하는 나무와 동물 형상은
신라금관과 형식상에서 차이가 있지만,
그 기본 문양의 모티브들이 같다.
그 모티브 세 가지는
신목과 순록과 새이다.
신목은 나무의 기둥이 줄기로
그리고 순록은 뿔만 남고
솟대처럼 뿔 위에 앉은 새는
입체에서 평면으로
이렇게 세 가지 요소가 압축과
단순 추상된다는 점.
이러한 이유로 인해,
사르마트 금관이
서부 스키카이 초기 제사장 금관과
신라 금관의 사이에서 발전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신목
순록 뿔
새
인도-스키타이(Indo-Scythians)
또는 인도-사카(Indo-Sakas)는
스키타이 유목민들로,
중앙아시아로부터 남쪽으로 이주해
오늘날 파키스탄과 북서인도에
박트리아 땅에 자리 잡게 된다.
사카인들이 인도 아대륙의 북서쪽으로 이주한 후,
이들이 이주한 지역은 '사카의 땅'으로 불렸고
오늘날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 위치한다.
그 지역을 페르시아어로
사카스타나 (Sakastāna)라고 불렸고,
아르메니아어에서는 사카스탄이라 불렀다.
이 내용은 사카인들이
오늘날의 인도와 파키스탄의 카슈미르인
지빈罽賓국을 공격하여 정착했다고 하는
중국의 기록과 일치한다.
거의 같은 시대인
인도 북부 인도-스키타이의 사카 왕국
(기원전 200년 - 서기 400년)의 유물에 속하는
마투라 사자 기둥머리에서 발견된
동시대의 카로슈티 비문에서도 증명되었다.
인도 스키타이의 왕 아제스 2세의 은화
기원전 35–12년
1978년 소련의 고고학자
빅토르 사리아니디 발굴팀이
과거 박트리아인 아프가니스탄 북부
틸리야 테페 6호분에서
역사적인 금관을 발굴한다.
그는 발굴당시의 기록을 담은 회고록에서
"금이다! 이윽고 무덤 하나가
곡괭이 아래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2천 년 동안 잠들어 있던
고대 박트리아의 공주가
우리의 눈앞에서 깨어나는 순간이었다."라고
글을 남겼다.
‘틸리야 테페’라는 말은
‘황금의 언덕’이라는 뜻이다.
고고학계에서는 발굴 당시
이집트 투탕카멘 황금 마스크 발굴에 버금가는
대발견으로 여겼다.
틸리야 테베 쿠르간은
기원전 1세기의 것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극도로 화려한 장신구를 걸친
다섯 명의 여성과 한 명의 남성 무덤으로
아프가니스탄 북부에 거주했던
스키타이 부족의 쿠르간이었다.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탈레반의 문화재 파괴로
많은 고대유적이 사라져 갔다.
아프가니스탄 7명의 박물관 직원들은
황금 보물을 지키기 위해
대통령 궁 비밀금고에 황금유물을 숨겨 두었기에
전쟁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미국이 탈레반 세력을 제거하고
아프가니스탄이 안정을 되찾으면서
이 황금 유물은
다시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목숨을 걸고 지켜 낸 것이기에
굉장히 영화 같은 스토리가
이 문화재에 담겨있다고 볼 수 있겠다.
황금 언덕의 유물들은
전쟁의 위기 속에서 지켜낸
세계 문화의 위대한 유산이 아닐 수 없다.
특히, 고구리 금관과 거의 동일한 점은
문화의 원류 혹은 문화의 어떤 흐름이
어떻게 이어졌는지를 생각해보게 하기에
우리에게 가치를 더한다.
이 유적지에서
1978년 발견된 황금 금관을 포함해,
아프가니스탄 고대 유물 천 4백여 점이
한국에서 전시된 적이 있다.
틸리야 테페 금관(45° 우측면)
틸리야 테페 금관(정면)
이 금관은 형태에 있어
뼈대가 되는 나무(신목)의 형태가
신라 금관과는 다르게 둥글고
위쪽 끝이 뾰족하며 모아져 있어서
미적으로 안정감을 준다.
그러한 신목을 상징하는 뼈대에
작은 둥근 알맹이들을 붙여 놓은 것은
신목이 빛을 발한다는 고대인들의 표현이다.
용들과 왕, 틸리야 테페, 아프가니스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