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건축과 미술
금관, 틸리아 테페 6호분
고구리 금관
틸리아 테페는 황금의 언덕이라는 뜻이다.
북 아프가니스탄에 위치해 있다.
틸리아 테페 유적은
다섯 여인과 한 남자의 무덤군을 말한다.
이 유적에서 유물로는
보석과 20,000개의 금장식이 발견되었다.
대개 금과 터키석과 라피스 라줄리(청금석)으로
만들어졌다.
스키타이의 주요 교역품이 금이었지만
청금석도 취급했던 것을 유물은 말해준다.
틸리아 테페는
옛 박트리아에 위치한 곳이다.
박트리아는
힌두쿠시 산맥과 아무다리아강 사이
일대를 지칭하는 곳으로
지금의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남쪽,
아프가니스탄 북쪽 지역이다.
물자가 오가고 부가 쌓이는 곳에
문화도 꽃핀다.
아프가니스탄 북부에 자리한
고대 박트리아가 그랬다.
박트리아는 실크로드 동서의 가운데 위치해
수천 년 전 교역이 활발했던 곳이다.
‘청금석의 길(lapis lazuli road)’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청금석 교역이 특히 유명했다.
청금석은 댱시나 그 이전부터
금이나 옥보다 더 귀한 보석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아프가니스탄은
질 좋은 청금석이 많이 나기로 유명한 곳이다.
아프가니스탄의 바다호샨주(Badakshan)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최고급 청금석의 산지이다.
이 지역의 청금석 광산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
청금석을 공급하였으며
오늘날에도 청금석을 공급한다.
박트리아에는 금과 청금석 무역을 병행하던
아시아 스키타이(동부 스키타이)인
사카족들이 살고 있었다.
무역 특성상
유일한 실크로드의 통로인
간쑤성의 둔황과 '하서주랑'에도 살고 있던
스키타이인들은 흉노족의 세력에 밀려
월지보다 앞서
같은 종족이 있는 박트리아로 먼저 이동한다.
이어서 옥무역을 하는 월지도
실크로드의 중심인 박트리아로
이동을 하게 된다.
월지의 두 차례에 걸친
박트리아로의 이동은
유럽 게르만족의 이동과
동아시아의 선비족의 이동과 함께
고대 역사에 있어
3대 민족 이동이라 불릴 수 있을 만큼
세계 역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3대 이동 중, 월지의 이동은
시대적으로 게르만의 이동보다
수 세기 빨라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점령 후
만들어진 헬레니즘 시대를 계승한
그리스 왕들이 박트리아 지역에 건설한
왕조를 파괴하는 결과를 낳았다.
박트리아에
같은 종족 스키타이가 밀려 들어왔으며
더불어 월지도 이어 밀려오자
기존 스키타이는 인도로 이동하므로
인도 - 스키타이를 형성한다.
인도 북부 인도-스키타이의 사카 왕국은
기원전 200년부터 서기 400년까지
600년을 유지한다.
그리고 월지는 박트리아에
쿠샨왕조를 세운다.
쿠산왕조는 불교 보급에 힘씀으로써
간다라 미술을 탄생시킨다.
마케도니아 > 헬레니즘 >
월지국 쿠샨왕조의 간다라 미술
금과 청금석 목걸이, 틸리아 테페 2호분
황금 허리띠, 틸리아 테페 4호분
청금석(라피아 라줄리)
틸리아 테페 4호분에서
허리띠가 출토된 것으로
남성의 무덤임을 알 수 있다.
반면, 금관은
6호분 여성의 무덤에서 출토된 것으로 보아
왕비의 무덤임을 짐작할 수 있겠다.
틸리아 테페 유물이
고고학자나 역사학자 사이에
갈등을 일으킬 만한 바가 크다.
큰 목걸이와 허리띠의 경우는 형태면에서
스키타이의 유물이 틀림없다.
그런데
기존 스키타이 유물에서는 보이지 않던
세련된 금관이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이유는 기존 스키타이 왕관은
서부 스키타이의 유물이었고
틸리아 테베의 유물은
동부 스키타이와 월지의 나라인
쿠샨왕조의 유물이었다.
같은 동이족 출신들이지만,
서부 스키타이의 금관은
마케도니아나 트리키아의 영향을 받았고
동부 스키타이의 금관은
오리지널이라는 차이랄까?
서부 스키타이(갈색)와
동부 스키타이(주황색)의 영향권.
월지는 환국 12개국 중 한 국가로
황하문명 이전부터
동이족 문화에 옥을 공급했고
동부 스키타이는 금을 제공해 왔다.
단군 조선 22대 소태 단군 때인
기원전 1281년에
색(스키타이)족의 불루가
우현왕에 등극되기도 한다.
환국, 배달국과 고조선, 부여, 고구리로
이어지는 역사에
금관을 제공한 것이 스키타이이니
스키타이와 월지가 공존하는
쿠샨왕조의 금관이
고구리의 것과 같다는 것은
알고 보면 당연한 일인 것이다.
고고학자들에게 논란을 일으킨 것은
스키타이나 월지에 대한
명확한 역사 정의가
내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유목 민족이나 이들과 같은
이동 민족을 다루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역사나 인류사의 배경 없이는
문화와 예술이 규명되지 않고
미스터리로 남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