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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플룻 역사와 기원

by 이승희


팬플룻의 유래


오늘날 팬플룻이라는 악기는

5세기 때 등장한 안데스 악기 시쿠(Siku)로

스페인어로 ‘삼포냐(Zampoña)’라고도 불리는

'남미형 팬플룻'과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해 루마니아에서 정립된

'나이(Nai)'를 기원으로 한

'유럽형 팬플룻' 두 가지를 일컫는다.




남미형 팬플룻


안데스 전통 악기 시쿠(Siku)는

남아메리카 고산 지역의 대표적인 관악기로,

원형은 아이마라족과 케추아족 등

안데스 원주민의 문화에서 비롯되었다.

여러 개의 갈대나 대나무 관을 길이에 따라 배열하여 만든

팬파이프 형태의 악기이다.

아이마라족(Aymara)은

시쿠(Siku) 악기의 역사적 중심에 있는 민족으로,

이 악기는 본래 아이마라어 사용 지역인

페루 남부와 볼리비아의 티티카카 호수 주변에서 비롯되었다.



시쿠의 기원과 아이마라족

시쿠는 500년경

티아와나코(Tiahuanaco) 문명 시기부터 등장했으며,

이후 아이마라족에게 전승되어 발전했다.

아이마라족은 안데스 고산 지역에 흩어져 살았는데,

잉카 제국이 15세기에 아이마라 지역을 정복했지만,

아이마라는 자체 문화를 보존하며 시쿠 전통을 유지했다.



종교적·사회적 의미

시쿠는 단지 음악 도구가 아니라

남성과 여성의 조화를 상징하는 영적 도구로 여겨졌다.

악기는 두 줄의 관으로 구성되며,

한 줄은 이라(Ira, 남성적),

다른 한 줄은 아르카(Arka, 여성적)라고 불렸다.

이 두 음열이 함께 연주될 때 비로소 완전한 음악이 만들어지는데,

이는 인간과 신, 남성과 여성, 자연과 사회의 조화를

표현하는 상징이었다.



음악 전통과 공동체 문화

아이마라족의 여성들은 예전부터 산에서 내려오며 시쿠를 연주했고,

여러 명이 각기 다른 음을 맡아 전체 곡을 협력적으로 완성했다.

이러한 연주 방식은 사회적 유대와 협력의 가치를 강조하며,

집단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안데스 지역

다른 민족들의 팬파이프 악기 비교

안데스 지역에서는 여러 민족이 서로 다른 이름과 형태의

팬파이프 악기를 발전시켜 왔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아이마라족의 시쿠(Siku),

케추아족의 안타라(Antara),

그리고 스페인어권에서 불리는 **삼포냐(Zampoña)이다.



주요 팬파이프 악기 비교

화면 캡처 2025-10-26 035352.png



케추아어와 아이마라어의 언어

두 언어 모두 교착어(agglutinative language)로,

접미사를 붙여 의미를 변화시킨다.

아이마라어 어순: SOV(주어-목적어-동사)

케추아어 어순: SOV(주어-목적어-동사)


북미 인디언이나 남미 인디오들 모두 교착어라는 점은

아시아 동쪽의 동이족이 이동해 갔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동이족의 아메리카 이주 기원

아메리카는 알라스카 에스키모들은 러시아의 에스키모들과 같다.

베링해가 붙어 있던 시기에 베링 지역을 거쳐

아시아에서 아메리카로 이주가 시작된 것은

세계 인류 학자들에 의하면 기원전 20,000년부터라고 추정한다.


북아메리카 인디안은 동이족이 이주해 형성된 것은

그들의 지명이나 민요가

고대의 동이족 언어로 만들어졌였음이 파악되어 왔다.

인디안이 아시아에서 건너 왔을 것을

처음으로 얘기한 학자는 프랑스 학자 조젭 드 기뉴였다.

그후 19세기 독일의 인류학자 요한 프리드히 불루멘바흐도

그 비슷한 얘기를 했다.

영국의 공자를 번역한 멜터 메드허스트도

주나라 무왕에 쫒겨 아메리카로 도망을 온 상(은)나라 군인들이

바로 인디안 조상들이었을 것이라는 얘기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주장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지는 못했다.

최근에는 그 결정적인 증거들이 발굴되고 있는 상황이다.


2011년 베링해를 형성하는 알래스카 쪽 수어드 반도에서

콜로라도 대학 연구팀은 집터 유적에서

고조선 시대인 기원전 3;400년 전 청동기 유물을 발견한다.



동이족의 나라 은나라(상나라)에서

뉴멕시코로의 이주

미국 학자 존 A. 러스캠프가 2005년부터

미국의 암각화를 발견하기 시작한다.

그가 발견한 암각화들 중에

은나라 시대의 갑골문들 중 태갑이라는 왕의 이름도 나온다.

태갑왕(太甲)은 은나라 탕왕(成湯)의 손자이자 제3대 군주로,

대체적인 재위 시기는 기원전 약 1536년경~기원전 1506년경이다.

왕의 명칭은 왕의 사후에 그의 치적과 성향에 따라 정해지니,

태갑왕 대에 은나라에서 미국으로 이주했다면,

암각화에 태갑왕 이름이 새겨진 것은

지금으로부터 어림잡아 약 3,500년 이전으로 보면 되겠다.




3,500년 전의 은나라 갑골문이 새겨진 암각화,

미국 뉴멕시코주 암각화국립기념지,

은나라 3대 왕 태갑의 갑골문 명칭이 보인다.



고구려의 멕시코로의 이동

동이족이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이동은 시대에 걸쳐

여러 경로로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고구려는 바틴칸의 자료에 의하면,

멕코리라 불렸다 는 것이 확인되었다.

멕코리는 맥족과 고리족의 합성어이다.

고리족은 고씨인 이 족의 준말이다.

동쪽의 이족인 동이족과 같은 이 족인 것이다.


고구려가 서기 668년,

당나라와 신라의 연합군(나당연합군)에게 패망한 후,

동만주에서 캄차카반도를 거쳐 알류산 열도를 통해

멕시코로 건너 갔다는 것이

미국 학자들의 알류산 열도 현지 답사를 통해 밝혀졌다.

고구리(멕코리)가 668년에 망하고 아메리카 대륙으로 넘어가

820년에 멕시코를 세우니, 멕코리가 멕시코가 된 것이다.



동부여가 이주해 시작된

남미의 팬플룻의 역사

남미의 원주민들의 팬플룻 시작의 역사는 5세기이다.

동양에서 남미로 이주했다면 북미 아메리카 원주민 보다는 짧고

멕시코의 고구리 유민보다는 약간 오래된 부여시대로 추정된다.


부여는 원래 만주 송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번영하던

예맥계 국가였으나,

4세기 중반 전연(前燕)의 모용황 침공(346년)으로

큰 피해를 입은 뒤 국력이 약화되었다.

이때가 부여계 세력 일부가 서쪽으로 이동한 시기이다.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동부여(東夫餘)는

410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공격으로 멸망하였다.

이후 고구리에 예속된 형태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5세기 후반 물길(勿吉, 말갈의 전신) 세력이 급성장하면서

외압에 시달렸다.

결국 494년, 부여의 국왕과 왕족이 고구려에 항복하면서

그 독립적인 정치체는 완전히 소멸하였고,

부여 지역은 고구리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부여가 멸망하며 부여의 일분파가 남미로 이주했다면,

동부여 폐망한 410년이 유력하다 하겠다.




유럽형 팬플룻


카발(Kaval): 대나무 또는 나무로 만든 쿠르드족의 관악기.

악기 상부에 두른 띠의 문양 X는 진리를 상징하는 문양으로

옛 전통을 잘 보존하고 있다 할 수 있겠다.




킴메르의 원류인 울긴(Ullgin)족


우크라이나의 '마야트루 키예프'에 의하면

탱그리(단군) 조선이 81개 칸국 연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라고 하고

81칸국 중 하나로 울긴(Ullgin) 칸국이 있었다 한다.


울긴족은 기원 자체가 분명치 않으나

'마마야트루 키예프' 외에

'살란 메다이바'와 '호메리온 셀람'에 수록되어 있다.

이 서적들은

"울긴은 대대로 조선에 조공하였고 우현왕의 통치를 받았다"라고

공통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울긴족은

사서로 기록되어 있는 유목민 중 가장 오래된 유목민이다.

그들의 흔적은 우크라이나 지역 외에 넓은 지역을 왕래한 유목민이었다.

러시아 이르쿠츠크 대학 고고학 팀은

1994년 바이칼 호수 동북부 지역에서

그들이 사냥하던 화살촉과 물품과 토기 등을 발견하였다.

그 토기들의 연대는 측정 결과 기원전 12세기로 나왔다.

기원전 12세기는 솔나 단군 시대이다.

한국의 고사서 '규원사화'에 의하면, 솔나 단군 원년에

북방 변두리 백성들을 넓은 곳으로 이주시킨다 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그 넓은 곳이라는 곳이

카푸카스 북부와 우크라이나 평원 지역이다.




킴메르


기원전 12세기에

바이칼 호수 동북부에서 초원의 길을 따라 이주해 온 울긴족이

도착한 곳은 초원의 길의 끝자락인 캅카스(코카서스) 지역이다.

기원전 1200년경부터 기원전 7~8세기까지 흑해 북쪽 스텝 지역을

중심으로 살다가 스키타이족의 침입을 받아 서쪽과 남쪽으로 이동한다.

일부는 소아시아(아나톨리아, 오늘날의 터키)로 진출해

프리기아와 리디아, 카파도키아 일대까지 활동 영역을 넓힌다.


킴메르인이 남하해 정착한 땅은

아시리아 제국이 활보하던 시대에 아나톨리아 북부었다.

울긴족가 캅카스 산맥 북부에서 키스피해 서안으로 이동해서

메소포타미아 북부로 진입한 경로가 특이하다만

남쪽 바빌로니아와 갈대아 우르를 끊임없이 위협했다.



이때 이주한 울긴족을

시리아어로는 치키미르(Chicimre)인이라 불렀고

그리스어로는 킴메르인이라 했다.




울긴족(킴메르족)의 캅카스에서의 남하




킴메르족의 후예, 쿠르드족


기원전 12세기에 킴메르인이 정착한 땅에는

지금도 그들의 후예인 쿠르드족이

인구 4000만 명에 달하는데

나라도 없이 어렵살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위치는 터키, 이라크, 시리아, 아르메니아의 경계에 걸쳐 있다.

대영제국과 프랑스가 중동에서 발을 빼면서 설정한

중동 국가들의 경계선의 최대 피해자가 바로 쿠르드족이다.




쿠르드족의 팬플루트 카발(Kaval)


쿠르드족은 전통문화를 잘 지켜오고 있는데,

그 중 카발(Kaval)이라는 대나무 또는 나무로 만든

쿠르드족의 팬플루트 악기가 있다.


쿠르드족의 카발의 기원은

기원전 1,200 년 고조선 시대이니

역사에 있어 역사로 고찰할 수 있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팬플루트이라 할 수 있다.




팬플룻의 어원

팬플룻을 고대 그리스어로는 '시링크스(σύριγξ)'라 하며,

명칭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목축의 신 '판(Pan)'에서 비롯됐다.

시링크스(Syrinx)는 그리스 신화 속 님프로,

순결한 여신 아르테미스를 섬기던 아름다운 요정이다.

전설에 따르면

시링크스는 목신 판의 구애를 받았으나

이를 거절하고 도망치다 라돈 강에 이르러

더 이상 도망칠 수 없게 되자,

강의 님프들에게 자신을 구해 달라고 간청했다.

이 요청에 따라 그녀는 갈대로 변했고,

판은 그 갈대를 꺾어

서로 길이가 다른 여러 개를 묶어 피리를 만들었다.

그 관으로 된 피리를 시링크스라 부르며,

판이 갈대를 묶어 만들었다 하여

이것이 오늘날 팬플루트(Pan flute)의 유래가 되었다.



그리스의 팬플랫이

이웃나라 스키타이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

그리스의 최초의 역사가 헤로도토스

(Herodotos, 기원전 484년경~425년경)가 등장하기 전에는

그 이전의 역사는 다 신화로 각색되어 내려온다.

헤로도토스의 역사(Histories)라는 저서에는

헤로도토스 당시에

지금의 우크라이나에 강력한 나라로 존재했던

스키타이에 대해 자세하고도 생생하게 나온다.


고대 그리스는 산이 많고 평지가 적어

폴리스(도시국가)가 발달하게 되었다.

도시들이 에게해에도 많았지만 흑해 연안에도 많았다.

흑해 연안의 그리스 폴리스들은

주로 기원전 8~6세기 사이 식민 활동을 통해 세워졌으며,

흑해 남쪽(오늘날 튀르키예 북부), 서쪽(불가리아·루마니아),

북쪽(우크라이나·크림반도), 동쪽(조지아)에 고루 분포했다.

각지에 있었던 폴리스들은 경제적으로는 무역을

그리고 문화적으로는 신화들이 생기는 배경이 되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역은 조지아 해안의 폴리스이다.

조지아의 캅카스(코카서스) 산맥은

프로메테우스의 그리스 신화를 탄생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캅카스 산맥 위쪽은 초원의 길의 끝자락이다.

그리고 서쪽으로 스키타이 왕국이 우크라이나 평원이 펼쳐진다.


스키타이와 그리스의 폴리스들을 흑해를 통해

활발한 무역을 전개해 나가고 더불어 문화 교류도 많았다.

그리스 문화는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문화와

페니키아의 글자의 영향을 크게 받아 성장했으며

동시대 인류 최초의 대륙 제국이었던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영향 또한 무시 못한다.


위의 여러 정황은

그리스 신화의 등장 하는 상부는 인간이고 하부는 말인

켄타우르스가

말 위에서 활쏘기로 유명한 스키타이 유목민을

상징화해서 신화가 된 것임을 유추해 볼 수 있게 한다.


이러한 여러 역사와 생활 상의 퍼즐을 마추어 보건대,

그리스 신화를 통한 팬플룻의 유래는

스키타이의 영향력이 있었다는 것도 생각해 봄직하다.

그리스 신화의 퍈은 목신이다.

목신은 유목과 들판의 신이다.

유목인이 피리를 만들었다는 이야기이다.

당시 유목민의 대표 주자는

단연, 최초의 유목민이라 일컫는 스키타이였으니.



헤로도토스가 본 스키타이

초원의 길을 따라 중앙아시아를 거쳐

서쪽으로 가다보면 도착하는 곳이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 카프카스산맥 북쪽 일대이다.

그곳은 서쪽에서 이동하는 민족이 늘

더 서쪽인 동유럽으로 진출하는 교두보(거점)로 삼았던 곳이다.


동양에서는 색족으로 표기된 스키타이족은

이동 무역 민족으로 상당히 광범위하고 활동적인 집단이었다.

일찍이 환웅 배달국 시대부터 초원의 길을 따라

몽골초원과 알타이를 지나 거대한 중앙아시아 대초원을 통과해

서쪽으로 이동해, 기원전 7세기부터

카푸카스 지역을 통해 아나톨리아에 다달아

먼저 와서 활동하던 킴메르족 용병으로 있다가

우크라이나 평야에 정착한 킴메르를 전복한다.


우크라이나와 카푸카스 지역은 흑해를 끼고 있다.

그곳에는 그리스 폴리스들이 진출해 있었고

스키타이는 그리스 등과 활발한 무역을 전개하고

레반트 지역까지 진출해 전쟁을 하기도 한다.



동양의 색족(스키타이)

북인도의 사카족이 되다

기원전 2세기경, 환인 12국 중 하나였던 월지족은

타림 분지 북부(감숙·신장 지역)에 거주했으나,

흉노 묵돌선우의 공격(기원전 176~160년)으로 서쪽으로 이동하였다.

이는 월지족 서쪽에도 있던 환웅계인 스키타이족을

밀어 내는 결과를 가져왔다.

박트리아(현 아프가니스탄 북부)로 밀린 스키타이는

박트리아에서도 뒤 이어 온 월지에 밀려

북인도까지 계속 이동해서 사카족으로 불리게 된다.


기원후 1세기경(약 A.D. 30)에

중앙아시아의 월지(月氏)족이 서쪽으로 이동하여

박트리아에 세운 제국이 쿠샨왕조이다.



기원전후부터 전쟁으로 서진한 나라들

화면 캡처 2025-10-24 235835.png



북흉노의 대이동

환단고기는 4권의 태고사를 묶은 태고사이다.

그중 '태백일사'와 '단군세기'는

흉노, 선비, 돌궐, 몽골 등의 북방 유목민들이 모두

단군조선의 제도·문화·종교 전통(삼신·제천사상)을

이어받았다고 설명한다.


'단군세기'에는

3세 가륵단군(嘉勒檀君) 6년조(B.C. 2177)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한다.


“임금께서 열양 욕살 삭정(索靖)을 약수(弱水) 지방에 유배시켜

종신토록 감금하였다.
후에 용서하여 그 땅에 봉하시니, 그가 곧 흉노의 시조가 되었다.”


이 기록은

흉노의 창시자가 원래 고조선 귀족 출신이었다는 사실과

흉노가 봉국(封國) 즉, 제후국이었다는 것을 전한다.
‘약수(弱水)’는 오늘날 감숙성(甘肅省)·오르도스 지역의 황하 지류로,

실제로 역사상 흉노의 초기 근거지로 알려진 곳과 일치한다.

이는 흉노를 책봉해 제후국으로 삼으므로서

고조선이 영역이 서쪽 초원으로 확장되었다는 역사적 결과를 의미한다.


기원전 209년,

묵돌(冒頓, Modu)이 부친 두만 선우(頭曼單于)를 제거하고

스스로 ‘선우(單于, 하늘의 아들)’라 칭하며 흉노제국을 창건한다.

묵돌 선우는 몽골고원 전역의 유목 부족들을 통합하고,

고조선계 국가들인 동쪽으로 동호(東胡)를,

서쪽으로 월지(月氏)를 격파하여 광대한 제국을 이루었다.

그의 후손들은 중국 진(秦)의 멸망 이후 혼란을 틈타 세력을 확장했고,

한 고조 유방을 평성 전투에서 포위하여 화친 조약을 맺게 했다.

이후 흉노는 한나라로부터 공물(비단·식량·주석)을 받아내며

강대한 초원 제국으로 군림했다.


그러나 한무제(기원전 141~87)는 반격을 개시해

장건의 서역 탐험을 계기로 흉노 포위 전략

(대월지 동맹, 무역 차단)을 추진하고,

위청·곽거병 등 장군들을 보내 북방을 공격했다.

기원전 119년의 모돈산 전투 이후 흉노는 결정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했고

1세기 무렵 흉노는 내분으로 남흉노와 북흉노로 분열되었다.

남흉노는 한 제국에 복속되어 중국 내지에 정착했고,

북흉노는 1세기 말 후한과 남흉노·선비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몽골 고원을 잃고, 2~3세기 동안 중앙아시아를 서진(西進)하게 된다.


서기 91년

후한의 대규모 북흉노 정벌전에서 패한 북흉노는

알타이산 금미산(今阿爾泰山)을 넘어 천산(天山)산맥 서쪽

오손(烏孫) 지역으로 피신했다.
이후 일부 집단은 일리강 계곡과 페르가나 분지에 정착했으며,

한때 오아시스 도시국가들과 연합하거나 약탈을 벌였다.
이 지역은 오늘날의 카자흐스탄 남부와 키르기스스탄 부근으로,

북흉노 세력이 처음 중앙아시아 문명권에 진입한 단계였다.


북흉노와 아틸라(Attila)는 약 400년의 시간적 간극이 있지만,

북흉노가 중앙아시아를 거쳐 서진한 결과,

유럽에 등장한 흉노는 유럽인들에게 훈으로 불렸다.

훈제국의 절정기에 나타난 지도자가 아틸라였다.


북흉노는 단순히 한 제국에 패한 유민이 아니라,

중앙아시아·유럽 유목문명의 매개자였다.

그들의 서진은 유라시아 초원에서 이어지는

훈족–돌궐–몽골로 이어지는 제국의 계보를 여는 출발점이 되었다.



부여와 유연

부여는 한민족 계통의 고대 국가로 만주 송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번성했으며,

유연은 흉노–선비계 유목민 전통을 계승해 몽골고원을 지배한 제국이었다.

서쪽으로의 이동은 유연이 먼저 한다.



부여의 형성과 발전

부여는 서쪽의 선비족, 남쪽의 고구려, 동쪽의 읍루와 접하며,

한·위·진과 외교를 유지했다.

특히 3세기에는 고구려와 선비, 서진(西晉)의 세력 각축 속에서 완충국 역할을 했다.

346년 모용황이 이끄는 선비계 전연(前燕)의 침공으로

왕 여현과 백성 5만 명이 포로로 잡히며 국력이 붕괴했고,

이후 494년 고구려 문자왕 때 완전히 병합되었다.



유연의 등장(4세기 후반)

유연(柔然)은 4세기 후반 흉노의 후예인 선비계 유목민 집단에서 등장했다.

모용선비가 멸망한 뒤, 그 잔여 기마세력이 알타이–고비 일대에서 통합되어

402년 셀렐(社崘)을 초대 가한(可汗)으로 추대하며 유목제국을 세웠다.

세력 확장: 유연은 몽골고원 전체를 지배하며 북위(北魏)와 충돌했다.

5세기 중엽엔 고구려 및 말기 부여 지역까지 영향력을 미쳤고, 동서 교역로를 장악했다.

유연은 ‘가한’ 칭호를 최초로 사용한 유목국가로서

이후 돌궐·위구르·몽골 제국 체제의 원형을 제시했다.

기마 군사력과 정치적 연합체제 면에서 흉노 계승자로 평가된다.



유연 제국이 세운 아바르족

프랑스와 스페인의 접경지대 피레네 산맥 끝자락 대서양 해안에

유명한 ‘바스크’족(Basques)이 살고 있다.

바스크족 언어는주위 유럽의 인도·유럽어족과 전혀 달리

고대 한국어와 문법이 같은 우랄어족이다.

신용하 서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고조선의 일파인 부여계가 전쟁으로 서쪽으로도 이동했는데

가장 멀리 이동한 경우 중 하나인 빌바오의 바스크족도

그에 해당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바르족은 유연 제국이 몰락한 직후인 AD 6세기경 동유럽에 등장한 유목 민족이다.

18세기의 동양학자 조셉 드 기뉴는 유연과 아바르족 사이에 연관성을 주장했다.


현대의 유전자 연구 결과에 의하면 아바르인과 유연이 연관이 있다는 가설은

매우 신빙성이 높아 보인다 한다.



부여족이 세운 나라 불가리아

부여는 346년 선비족 모용황의 침입을 받아

5만여 명의 백성이 포로로 잡혀가는 타격을 받는다.

중심 세력을 잃은 부여족의 한 갈래

4세기 말 초원의 길을 따라 서쪽으로 이동하여

중앙아시아의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 북캅카스 일대에 도착한다.

이때부터 서양에서 부여족은 불가르족으로 기록된다.


초원의 길을 따라 서쪽으로 이동하면 캅카스 북쪽에 당도한다.

그곳에는 먼저 이동해 온 유연의 세력 아바르족이 있었다.


635년 불가르족의 족장 쿠브라트는 아바르족의 지배에서 벗어나

불가르족을 연합을 결성해 '마그나 불가리아'

(대 불가리아, Magna Bulgaria)를 건국한다.

그러나, 건국 7년 만에 쿠브라트 칸은 죽고

이후 튀르크계 유목민족 하자르의 침입으로 붕괴되고,

그의 아들들은 여러 곳으로 흩어진다.


둘째와 세째 아들은 독립국가를 세웠다.

둘째 아들 코트라그가 세운 고추불가국은

14세기까지 번창하였고 현재는 타타르 자치국으로 존재한다.


세째 아들 아스파루흐는

678년 다뉴브강을 건너 발칸반도에 도착하였으며

681년에 3~5만 명의 군사로 비잔틴 로마군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발칸반도에서 불가리아을 건국했다.

불가리아라는 이름은 '불가르족의 땅'이라는 의미이다

부여족은 귀족 신분이 되어 보야라고 불렸으며

스라브족을 백성으로 다스렸다.


부여족의 한 갈래 > 불가르 > 불가리아


그들이 밝안산이라 이름 지은 산 아래에서 단군에게 제사를 올렸다.

그리고 밝안산은 발칸산이 되고 지금의 발칸반도의 이름이 된다.

5세기 흑해 지방 마그나 불가리아를 기원으로 하고 있는 불가리아는

부여가 세운 나라였다.


그래서 불가리아는 유럽국가 중 동양계 모습이 얼굴에 많이 섞여 있으며

유별나게 한국과 친연성이 높으며 언어와 문법 구조도 한국어와 비슷하고

또한 몽골반점을 가지고 있고 비슷한 전통문화가 남아 있다.

그 전통문화 중에 팬플룻이 있고 현재 루마니아가 팬플룻의 종주국이 된다.



루마니아의 전통 팬플루트

나이 (Nai)는 루마니아의 전통 팬플루트로,

세계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팬플루트 형태 중 하나이다.

갈대나 대나무로 만든 여러 개의 관을

반원형으로 배열해 만든 관악기이며,

각 관의 길이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 다른 음높이를 낸다.

보통 20개 이상의 관으로 구성되며, 긴 관일수록 낮은 음을 낸다.

관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갈수록 짧아지고 음이 높아진다.

각 관은 벌집 밀랍(beeswax)으로 조율되며,

루마니아 민속음악에서는 G 조,

클래식에서는 C 조로 맞추는 경우가 많다.

관의 지름도 점점 줄어들며,

이는 일정한 음색과 음량을 유지하기 위한 구조적 특징이다.

연주자는 악기를 비스듬히 기울인 상태에서

입김의 각도를 조절해 반음을 낸다.


고대

루마니아 지역에서는 결혼식, 축제, 종교 의식 등에서

주요 악기로 사용되었으며,

후에 전문 음악가 집단인 라우타리(lăutari)의

대표적인 악기가 되었다.

고대 루마니아 지역에서는 결혼식, 축제, 종교 의식 등에서

주요 악기로 사용되었으며,

후에 전문 음악가 집단인 러우타리(lăutari)의

대표적인 악기가 되었다.

나이는 유럽형 팬플룻의 대표 악기로

안데스식 삼포냐(Zampoña)보다

부드럽고 유려한 음색이 특징이다.



백제 금동대향로의 배소(팬플룻)

백제 금동대향로 제작 콘셉트는 오행을 박산 위 정상부에

다섯 가지 악기를 연주하는 악사들을 배치함으로써 표현했다.

그 악기들은거문고, 완함, 종적, 배소, 북이다.

즉, 현악기 2, 관악기 2, 타악기 1로 구성되어 있다.

고음에서 저음으로 나열하자면

종적 > 완함 > 배소 > 거문고 > 북 순이 되겠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는 악기는 배소이다.

배소는 팬플룻이다.

금동대향로를 저술한 저자에 의하면

배소는 인도에서 유래되어 초원의 길의 중심에 있는

쿠차를 통해 고구려로 전해졌다고 본다 한다.

그러나 그건 불교 문화의 경로이고 전쟁으로 민족 이동 경로로 보건대

인도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동양 문화가

기후나 전쟁으로 인해 생존을 위해 서쪽인 인도나 현 동구 유럽권으로

이동했다는 것이 역사 정황으로 보아 맞다고 본다.




백제 금동대향로의 배소 악사




결론


남미형 팬플룻의 전래는

410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공격으로 멸망한

동부여의 남미 이주에서 비롯된다.


유럽형 팬플룻의 전래는

배달국의 일파인 최초의 무역민족인 스키타이가

북캅카스와 지금의 우크라이나에 나라를 세움으로

거래국인 그리스 폴리스에 전해지는 것으로 비롯된다.

그리고

4세기 말, 선비족에 시달리던 부여족의 한 갈래인 불가르족이

서진해서 불가리아를 건국함으로 이루어진다.


이외에도

백제를 통해 전해진 배소,

중국과 국악기에서 쓰이는 소(簫),

태국의 웟(Wot),

조지아의 라체미(ლარჭემი) 등

길이, 즉 음높이가 다른 여러 대의 관을 모아 만든 악기들이

전세계에 존재한다.


이상으로 세계 역사를 살펴봄으로써

팬플룻이 세계 곳곳에 고루 퍼져 있는데 기여한 것은

진취적이고 이동성이 좋은 스키타이족이나

부여계 나라들의 영향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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