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지키는 명절의 기술
올해 명절, 나는 시댁에 가지 않기로 했다.
혼자 있고 싶어서다.
명절만큼은 대한민국의 며느리들이 같은 마음이지 않을까.
결혼 전에는 전도 안 부쳤던 내가 결혼하고 나서는
명절에 허리도 제대로 못 펴고 전만 부치고,
설거지옥에 빠지는 흔한 레퍼토리.
내가 직접 했지만 정말 맛없었던 전과 나물을 먹는 척만 했다.
배고팠던 난 챙겨간 과자와 젤리를 시댁 큰집 방구석에서 몰래 먹었다.
그 모습을 본 남편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얼마나 맛있는데, 왜 밥을 놔두고 젤리를 먹어?"
사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
결혼 초, 시부모님께 예쁨 받고 싶어 옷에 열심히 밀가루를 묻혀 가며 전을 부치고,
큰 시어머님께는 쌈을 싸드리며 딸 같은 며느리가 되려 했다.
하지만 시댁 식구들이 툭툭 던지는 말이 내 마음을 조금씩 건드렸다.
저녁상을 차리고, 치우고, 설거지까지 다하고 나서 남자들이 마시는 술상에 나도 껴들었다.
열심히 일했으니 이제 나도 즐길 차례라고 생각했다.
(난 소주, 맥주, 막걸리, 청주, 양주 다 좋아한다.)
그런데 술 마시는 나를 보며 시아버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자는 아이를 낳아야 하기 때문에 몸이 따뜻해야 한다. 술은 몸을 차갑게 해"
설날 명절마다 한복을 입는 유구한(?) 전통을 가진 이 집안에서
난 옷고름을 제대로 매지 못해 큰 시아버님께 꾸중을 들었다.
“질부, 옷고름 제대로 맬 때까지 어디 못 가!"
여자들만 음식하고 상 차리는 것이 슬슬 열받던 차에
유치원생 딸조카가 국을 더 가져오라는 자신의 아빠에게 톡 쏘아댔다.
"아빠는 왜 엄마한테만 시켜?"
그 말을 듣자,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말이 튀어나갔다.
"OO야, 너는 커서 결혼하면 남자한테 다 시켜"
그러자 큰 시어머님은 갑자기 빽 소리를 질렀다.
"남자가 불쌍하다"
그날 이후, 딸 같은 며느리가 되어야지 하던 마음은 완전히 사라졌다.
명절증후군, 고부갈등, 한국의 가부장적 문화를 아주 우습게 봤다.
부부의 사랑으로 극복 가능하다고 착각했다.
아이를 낳고 나니 명절은 더 큰 고역이 됐다.
갓난아기를 안고 두 시간 거리의 시댁 큰집을 들렀다가,
다시 시부모님을 집에 모셔다 드리고 다섯 시간 거리의 친정을 향했다.
그 여정은 명절이 아니라 체력 테스트였다.
그래서 남편에게 제안했다.
설날에는 시댁, 추석에는 친정만 가자고.
쉽지 않았지만, 결국 합의했다.
(남편이 경상도 사람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꽤 큰 진전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 우리는 새로운 결정을 내렸다.
앞으로 명절에는 시댁을 가지 않기로 했다.
단, 나 혼자만.
초등학생인 딸은 이해하지 못했다.
"엄마, 제발 같이 가자. 10회 안마권 줄게"
그 말에 웃음이 나왔지만, 마음은 무거웠다.
딸의 머리는 누가 묶어줄지, 밥은 누가 챙겨줄지 걱정됐다.
하지만 내가 억지로 시댁에 가서 인상 쓰는 모습을 보이는 게
아이에게 더 나쁠 것 같았다.
그래서 말했다.
"엄마가 요즘 회사 일도 많고, 좀 지쳤어. 이번엔 집에서 쉬면서 마음을 비워야 할 것 같아. 대신 다음엔 엄마가 더 많이 놀아줄게"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떠나는 날 아침, 차에 오르기 전까지 물었다.
"엄마, 진짜 안 가?"
결혼 후 처음으로 이틀 동안 혼자 있었다.
이상했다.
항상 아이와 집안일에 치여 살던 내가
갑자기 시간부자가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휴대폰으로 웹툰, 웹소설을 실컷 봤다.
유튜브로 드라마 요약본도 봤다.
몇 달째 미뤘던 아이 책장을 정리하고,
포토카드와 장난감까지 다 치웠다.
그렇게 하루가 흘러갔다.
이틀째엔 운동도 하고, 마트도 다녀왔다.
그런데도 시간이 남았다.
그래서 이불빨래를 했다.
그러다 문득, 아이 생각이 났다.
항상 집에서 영화 보며 맥주 마시는 게 소원이라 말하던 나였는데,
막상 혼자 있으니 시간이 너무 많았다.
뭘 해야 할지 몰랐다.
그때 깨달았다.
언젠가 아이가 내 품을 떠나면
나는 이렇게 홀로 남겠구나.
그때를 위해 혼자 있는 연습을 미리 해야겠구나.
자식 다 키우고 시간 여유가 넘치는 우리 부모님은,
독신으로 사는 사람들은 남는 시간을 어떻게 견뎌낼까.
외롭지 않을까.
시댁이 싫고 남편이 미워서 명절 독립을 선언한 게 아니었다.
명절에 나 자신을 계속 소모하다가는 그들이 정말 미워질 것 같아서
독립을 선언한 것이었다.
그런데 가족으로 꽉 차 있던 시간을,
무엇으로 채워넣을지 고민하지 않았다는 걸
혼자가 되니 깨닫게 됐다.
명절 독립은 단순히 시댁에 가지 않는 게 아니다.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은 사람이 되는 일이다.
이제부터 명절에는
많은 며느리들이 명절증후군 대신
자신만의 평화를 찾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