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원의 어쩌다 농부]
손이 많이 가지 않을 것. 알아서 잘 클 것. 병충해에 강할 것. 풀을 이겨낼 것. 물을 자주 주지 않아도 될 것. 한 번 심어두면 월동하고 내년에 알아서 또 나올 것. 누가 이 작물을 모르시나요~ 농사 카페에 질문을 쏟아냈다.
주말에만 내려가야 하니 손이 많이 가는 예민한 작물은 키우기 어렵다. 예기치않게 주말에 경조사라도 있는 날에는 2주만에 내려갈 수도 있다. 해마다 심고 거두는 작물은 5도2촌에서는 무리다. 성격 무던하고 튼튼하고 장수하는 녀석을 찾아야 한다.
농사 카페 대선배님들의 대답은 단호했다.
“놉! 그런 작물은 세상에 없습니다. 모든 농작물은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큽니다.”
발자국 소리를 녹음해 24시간 틀어놓아야 하나. 묻고 또 묻고. 그나마 원하는 작물에 가장 근접한 것이 작약이었다. 작약은 노지월동을 하기 때문에 봄이 되면 저절로 새싹이 돋아난다. 병충해에도 비교적 강하다. 한 번 심어두면 뿌리가 계속 번식한다. 작약을 찾아내고 나서 그야말로 ‘환호작약’했다.
작약 선배들의 조언에 따르면 작약은 봄, 가을 어느 때고 심어도 되지만 가을에 심는 것이 더 좋다. 그렇다면 가을까지 기다려야 할까도 잠깐 생각했지만, 내가 누군가. 성질 급하기 대회가 있다면 세계 1위를 할 재목 아닌가. 봄을 놓칠까 싶어 서둘러 주문에 나섰다.
뿌리를 약용으로 쓰는 토종작약을 패스하고(뿌리를 캐는 노동과 뿌리를 판매하는 마케팅 둘 다 자신이 없었다), 꽃 보자고 겹작약으로 결정했다. 꽃이 피면 내가 즐기고, 주문이 들어오면 판매도 하고, 꽃이 지면 내년을 기다리면 된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서클 오브 작약 라이프’인가.
겹작약 종근을 온라인쇼핑으로 구매하던 날의 떨림이 아직도 손끝에 남아있다. 손바닥만 한 인삼 크기의 종근 30개에 103만6500원. 겹작약은 수입종이라 비싸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이 작약들은 에치드살몬, 사라베르나르트, 몬스줄스엘리처럼 영원히 암기는 못할 이국의 이름을 가졌다. “얼마에 샀냐”는 엄마께는 10분의 1 가격인 10만원을 주고 샀다고 당당히 말씀드렸다. 엄마는 10만원도 비싸다고 뭐라고 하셨다. 이왕 깎는 거 5만원이라고 할 걸 그랬다고 뒤늦게 후회.
겹작약을 심기로 했다고 SNS에 올렸더니 친구들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제일 좋아하는 꽃이 작약이라는 고백부터 꽃이 피면 당장 주문하겠다는 선주문까지 쏟아졌다. 나 농사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것 아닐까. 비록 3명이지만, 심기도 전에 판매 예약이라니!
배송받은 작약 종근을 텃밭의 고갱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에 소중하게 심었다. 30개 종근을 심으니 6개의 이랑과 고랑이 만들어졌다. 시작은 미약하지만 나중은 창대해질 작약밭을 상상하며 뿌듯해하고 있는데, 동네 아주머니께서 지나가다 툭, 한 말씀 하셨다.
“아이고, 작약 같은 건 뒷동산이나 밭 가에 심고 거기는 먹을 걸 심어야지. 당장 캐서 한쪽에 치워버리시게.”
동네 분들에게 작약은 잎만 무성해 자리만 차지하고 먹을 수는 없는, 당최 쓸모없는 작물이었던 것이다. 그런 작약을 텃밭 가운데 떡하니 심어놓았으니, 지나가는 동네 어르신들의 표정이 왜 그러했는지 알 것 같았다.
작약 종근을 심고 난 후 약 일주일쯤 지났을 때 세상이 궁금하다는 듯 붉은색 싹이 삐죽 머리를 내밀었다. 새싹은 한주가 다르게 쑥쑥 자라 한 달 때쯤 지나니 비록 키는 작지만 당당하게 꽃망울까지 만들어냈다. 첫해에는 꽃을 보기 힘들다는 농원 사장님의 말씀을 듣고 일찌감치 기대를 접고 있었던 터라 기쁨이 더 컸다.
꽃망울을 맺은 후에는 작약의 성장이 멈춘 것만 같았다. 이번 주에 가도 비슷하고 다음 주에 가도 비슷한 크기였다. 어떤 꽃을 보여줄지 마음이 부풀어가는 내 사정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는 작약의 느긋한 태도가 과연 꽃의 여왕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