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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효원 Jun 18. 2024

③이 미칠듯한 수렵채집 본능

[김효원의 어쩌다 농부]


세계적인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에 따르면 ‘호모 사피엔스는 존속 기간의 대부분을 수렵채집인으로 살았’기 때문에 ‘현대인의 사회적 심리적 특성 중 많은 부분이 농경을 시작하기 전의 기나긴 시대에 형성됐고 오늘날에도 우리의 뇌와 마음은 수렵채집 생활에 적응해 있다’.     

호모 사피엔스의 DNA를 가진 나는 유전의 영향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었다. 농사를 마음먹은 계절이 하필 나물 시즌이라, 산에서 들에서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것을 득템하는 재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씨앗이나 모종을 사다 심는 건 내일 해도 되지만 나물은 내일까지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쑥떡을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엄마는 골짜기 쪽 쑥 자생지를 주로 공략했다. 바랑 가방을 메고 탁발스님처럼 훌쩍 집을 나서면 해가 빛을 잃어갈 때까지 돌아오실 줄 몰랐다. 돌아오는 엄마의 가방은 쑥으로 터져나갈 듯했다.     


나는 두릅 따기에 주력했다. 따끔따끔 가시에 찔리게 되는 두릅은 장갑을 두 개 겹쳐 끼고 따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따끔한 맛을 보게 된다. 두릅을 알뜰히 따고 난 후에는 농사 카페에서 배운 대로 가지를 짧게 잘라주었다. 가지를 잘라주면 두릅을 따기도 편하고 내년에는 더 풍성한 가지들이 새로 나온다고 한다. 아버지의 두릅나무는 키가 2m를 훌쩍 넘어 온갖 도구를 동원해도 따기가 쉽지 않았다. 진즉 농사 카페에서 배웠더라면 아버지가 두릅을 따기 쉽게 가지를 짧게 잘라줄 수 있었는데…늦었다고 생각할 때는 이미 늦었다.     


그나저나 무향 무취 무맛의 두릅은 도대체 무슨 맛으로 먹는 걸까. 초장을 찍으면 초장맛, 기름에 구우면 기름 맛밖에 나지 않던데. 가시의 따끔따끔한 맛으로 먹는 건가. 두릅의 맛을 알아야 그때부터 어른인 걸까. 잡생각은 그만하고 두릅 따기에 집중하라고 두릅이 따끔하게 찌른다.     


냉이, 달래, 고들빼기, 취나물, 고사리, 민들레, 돌나물, 원추리, 쑥, 며느리취…이 모든 것이 공짜였다. 세계 1, 2위를 다투는 장바구니 물가를 생각하면 채집을 멈출 수가 없었다.    

 

채집 본능은 점점 커져 엄마와 나는 ‘산삼’이라는 원대한 포부를 안고 산을 타기 시작했다. 채집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크고 좋은 것은 산삼 아니겠는가. 어린 시절 할아버지께 배웠던 화투 ‘육백’ 용어로 치면 산삼은 ‘칠띠’나 ‘용코’쯤이라 할 수 있다.     


평소에는 멧돼지가 있어 올라갈 엄두도 내지 않았던 산이었다. 할아버지가 소금 팔러 강릉에 갈 때는 호랑이를 만나기도 했다는 깊은 산인데, 산삼의 유혹은 멧돼지, 호랑이보다 힘이 셌다.     


깊은 산은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햇빛이 슬쩍 들어 어두컴컴한 산은 가랑잎과 솔잎이 잔뜩 떨어져 길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간혹 고사리, 취나물이 있고, 주인을 잃은 무덤가에는 둥굴레가 환하게 군락을 이루며 꽃을 피우고 있었다. 연한 연두색, 다섯 장의 잎, 산삼인가 하고 달려가 보면 오가피였다. 오가피와 산삼은 줄기로 구분할 수 있다. 줄기가 목질화돼있으면 오가피, 그렇지 않으면 산삼이다. 오가피에 하도 속고 나니 깊은 산속 오가피 서식 금지령이라도 내리고 싶어졌다.     


엄마와 내가 채집으로 눈을 이글거리고 있을 때 여동생은 뒤란 구석구석 쌓여있는 보따리들을 정리하느라 바빴다. 이 보따리 저 보따리 풀어보면 모두 묵나물이라고 했다. 해마다 가득가득 채집해 말려놓고는 미처 먹지 못해 계속 쌓인 쑥이며 고사리 같은 묵나물들이 화수분처럼 계속 쏟아져나와 마당에 쌓였다. 동생은 아궁이에 불을 피우고 꽤 오랜 시간 묵나물을 태웠다.     


그러고 보니 엄마가 채집하는 것은 봤지만 그 채집물을 꺼내 음식으로 만드는 건 본 기억이 거의 없다. 엄마에게는 채집물을 요리해 먹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채집의 기쁨을 만끽하는 것으로 충분해 보였다. 엄마가 왜 그렇게 채집에 열을 올렸는지, 체험해보니 알겠다. 유발 하라리의 식견은 탁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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