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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효원 Jun 18. 2024

④적뢰, 적화, 적과…군사용어 아닙니다

[김효원의 어쩌다 농부]


과일값이 금값이다. 마트에 가면 예쁘고, 크고, 빛깔이 좋은 과일에 눈과 손이 간다. 그러나 이내 가격에 놀라 손을 거두게 된다. 요즘같은 고물가시대, 서민들에게 과일은 전형적인 사치재다. 과일을 직접 생산(?)해 먹어볼까 하는 의욕이 마구 솟았다.     

꽃이 다글다글 피어있는 복숭아 나무.

과일 농사를 결심하고 나서 ‘3적’이라는 막강한 적을 만났다. 3적은 적뢰, 적화, 적과다.     


무시무시한 느낌이 드는 적뢰, 적화, 적과는 군사용어가 아니다.     


이때 적은 딸적(摘)이다. 적뢰의 뢰는 꽃봉우리뢰(蕾). 적화의 화는 꽃화(花). 적과의 과는 과일과(果). 곧 적뢰는 꽃봉우리 따기, 적화는 꽃 따기, 적과는 과일 따기다.

     

크고 좋은 과일을 얻기 위해서는 3적이 필수다. 한 나무에 과일이 과도하게 많이 달리면 과일 크기가 작을 수밖에 없다. 과일의 열매를 크게 키우기 위해서는 무수히 많은 꽃과 어린 열매를 부지런히 따서 버려야 한다.     

복숭아꽃이 만발한 지난 봄날, 적화를 완수해보겠노라. 원대한 포부를 품고 나무 앞에 섰다. 나무 한 가지에는 수십, 수백 개의 꽃이 조롱조롱 매달려있다. 멀리서 보면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노래가 흥얼거려지는 목가적인 풍경이지만 적화 앞에서는 꽃 한 잎 한 잎이 노동이다.     


미리 공부한 바에 따르면 꽃을 딸 때 열매가 매달릴 위치를 생각하면서 따야 한다. 열매가 가지의 위쪽에 달리면 좋지 않다고. 따라서 가지 위에 달린 꽃은 모조리 따주는 것이 좋다. 가지 끝에 달린 꽃도 따야 할 대상이다. 가지 끝은 영양소가 전달되기 쉽지 않다고 한다.     


‘가지 위’와 ‘가지 끝’을 입엣말로 중얼거리며 적화를 시작한다. 5분도 지나지 않아 손끝이 뻣뻣해지고 다리가 아파져 온다. 고개를 쳐들고 꽃을 따려니 목덜미도 찌릿찌릿. 가지 몇 개 잡고 씨름하다가 나무 한 그루 적화를 채 끝내지 못하고 두손을 들고 말았다.     


“꽃은 예쁘니까 두고 보다가 열매 단계에서 따주면 되겠지”라며 그럴듯한 핑곗거리도 만들어낸다.  

   

꽃이 지고, 손톱만 한 열매가 나오기 시작한 어느 날. 이번에는 적과에 도전했다. 원칙은 같다. 가지 위에 달린 것과 가지 끝에 달린 것을 따줄 것.     


꽃에서 열매로 얼굴만 바뀌었을 뿐 숫자는 다글다글 많기도 하다. 열매 따기라고 쉬울 리가 있나. 역시나 팔, 다리, 목이 “제발 날 좀 살려달라”고 고통을 호소한다.   

  

팔, 다리를 살리기 위해 두뇌를 가동한다. 올해의 열매는 포기하고 겨울에 강력한 가지치기로 해결해보자고 작전을 세우고는 또다시 서둘러 퇴각한다.     


그 결과 올해 나의 복숭아나무는 마치 개복숭아처럼 작고 볼품없는 열매를 수백개 매단 채 익어가고 있다. 복숭아라기보다 매실에 가까운 크기다.     


바로 이때가 요즘 유행하는 ‘원영적 사고’(아이돌 가수 장원영의 초 긍정적 사고를 뜻하는 말.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다 나에게 좋은 일이라는 마음가짐을 의미한다)를 풀가동할 시점이다. 개복숭아 효소가 그렇게 몸에 좋다는데, 이 작고 귀여운 복숭아를 따서 효소를 담아야겠다고. 모양이 개복숭아 같으니 개복숭아 효과가 조금은 있을 게 분명하지 않나.     


크고 좋은 과일이 얼마나 많은 농부의 손길을 거친 끝에 탄생했을지, 이제야 조금은 알겠다. 과일값이 왜 이리 비싸냐고, 과일 모양이 왜 이리 못생겼냐고, 과일 색이 왜 이리 흐릿하냐고 타박했던 말들을 할 수만 있다면 다시 주워 담고 싶다.     


어쩌다 농부가 된 후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역지사지다. 온전한 소비자에서 절반의 소비자, 절반의 생산자가 돼보니 생산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겠다. 나의 살던 고향 꽃피는 산골에서 농부들이 어떤 고군분투를 벌이고 있는지, 이제라도 알게 해준 3적에 감사한다.     


*이 글은 스포츠서울에 연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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