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원의 어쩌다 농부]
2주 만에 텃밭에 가보니, 풀의 기세가 대단했다. 가장 공들인 작약밭은 제초매트를 깔아둔 덕에 그나마 고랑에는 풀이 나지 않았다. 작약이 커가고 있는 이랑에 난 풀들만 뽑아주면 돼 비교적 수월했다.
당근, 시금치, 상추, 고추, 토마토 등 채소를 심어둔 곳은 풀 반, 채소 반이었다. 참깨 씨앗을 뿌린 곳은 풀이 참깨를 누르고 자라 참깨가 살려달라 소리 없는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긴급히 호미를 들고 진입해 참깨 일병을 구하기까지 약 반나절의 시간을 고군분투해야 했다.
올봄 농사는 메밀을 재발견한 시즌이라고 쓰고 밑줄을 쫙 그어놓으려 한다. 두둑도 돋우지 않고 맨땅에 훌훌 뿌려 심어놓은 메밀은 들인 공에 비해 황송한 결과물을 보여주었다. 풀을 이겨내고 메밀이 쑥쑥 잘 자라 소금 같은 꽃을 피웠다. 예쁜데다 또 먹을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아름다운 텃밭의 정석이 있을까.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라고 묘사한 소설가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의 문장이 저절로 떠올랐다.
만개한 메밀꽃을 보며 흐뭇해하고 있을 때 엄마는 “꽃 피기 전에 뜯어다 국 끓여 먹었어야 했는데”라고 아쉬워하셨다.
“안 돼요. 엄마 이거 씨 받아야 해서 싹 먹으면 안 돼요.”
어린 시절, 할머니가 꽃바위 언덕에 올라 메밀 싹을 뜯어다 국을 끓여주셨던 기억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메밀 싹은 어릴 때 따서 된장국을 끓여 먹으면 그 어떤 된장국보다 맛있다. 보들보들 매끈매끈한 메밀 싹이 목구멍으로 술술 넘어간다. 너무 맛있어서 자꾸 끓여달라고 조르면 할머니는 더는 안 된다고 하셨다. 싹을 많이 뜯어먹으면 아무래도 메밀 소출이 적어지기 때문이다.
엄마도, 나도 올 봄에 메밀 싹 된장국을 맛보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엄마. 메밀은 봄, 가을 두번 심을 수 있대요. 가을에는 꼭 메밀 싹 된장국 끓여 먹어요.”
그러고 보니 메밀의 추억이 또 생각난다. 이북이 고향인 할아버지는 겨울이 되면 꼭 뒷짐을 진채 “막국수나 먹자” 한마디 하셨다. 그러면 할머니와 엄마는 메밀을 빻아 가루 내 반죽해 치댄 후 가마솥에 국수틀을 걸고 막국수를 뽑았다. 얼음 박힌 동치미 국물에 말아 먹는 투박한 막국수였지만 겨울에만 맛볼 수 있는 별미 중 별미였다.
요즘 서울은 평양냉면 전성시대다. 우래옥, 을밀대, 필동면옥, 평양면옥, 을지면옥 같은 평양냉면집들이 냉면맛감별사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평양냉면뿐 아니라 들기름막국수도 인기 대열에 올랐다. 냉면이나 막국수 모두 메밀로 만든다는 점에서 메밀 전성시대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듯하다.
메밀이 이토록 인기를 끌고 있는데 메밀 농사는 몹시도 수월하니 메밀 농사를 늘려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 게다가 메밀은 봄, 가을 2모작이 가능하다. 같은 땅에서 수확을 두배로 할 수 있으니 메밀과 사랑에 빠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영월 예밀리에서 메밀로 빵을 만드는 브레드메밀 최효주 대표가 한 ‘세바시’ 강연을 유튜브에서 본 적이 있다. 메밀은 끈기가 적어 빵을 만들기에 적합한 곡물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여러 실험을 통해 건강한 메밀 빵을 만들 수 있었다고.
올가을 메밀 농사가 대풍을 이룬다면 잘 수확해서 자루에 담아 브레드메밀에 찾아가 보려고 한다.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없는 것에 도전해 새로운 길을 만들어내고 있는 최 대표와 수인사하고 그분이 개발한 메밀 빵과 바꿔와야겠다. 급한 성질 대회 1등감 답게 가을 메밀 심기도 전에 빵과 바꿔 먹을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