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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깨가 쏟아지던 날

[김효원의 어쩌다 농부]벌써 2년차

by 김효원

해마다 여름이면 “역대급으로 덥다”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매미보다 더 목청 높여 ‘덥다송’을 부르다 보면, 더위의 정점에 입추가 오고, 입추가 되면 신기하게도 가을이 온 것처럼 더위가 견딜만해진다. 입추 매직이다.

입추가 지나면 햇살은 더욱 따가워지면서 곡식을 여물게 하고 열매를 익게 만든다. 새파랗던 참깨 이파리가 하나둘씩 갈색으로 물들어가는 것도 입추가 지나면서부터다.

참깨 이파리가 누렇게 변하면 수확할 시기가 다가왔다는 뜻이다. 사진=김효원

참깨를 수확해야 하는 날짜는 딱히 정해져 있지 않다. 참깨 이파리가 누렇게 변색되기 시작하면 수확할 시기가 됐다는 뜻이다. 정확한 시기는 오직 감에 의존해야 한다. 참깨는 줄기가 위로 자라며 계속 꽃이 피기 때문에 처음 맺힌 깨와 나중 맺힌 깨가 익는 속도가 다르다. 맨 아래쪽 깨가 완전하게 익어 꼬투리가 벌어져 땅에 떨어져도 맨 위쪽에서는 계속 참깨 꽃이 핀다. 그래서 어느 정도 열매가 맺히면 꽃이 더 이상 피지 않도록 줄기 끝을 잘라줘야 한다.

6월 3일 심은 참깨 모종. 사진=김효원

올해 참깨는 지난 6월 3일, 읍내에서 모종을 5판+반판을 사서 심은 것들이다. 모종 값은 모두 8만 1000원이 들었다. 로터리를 치고 비닐을 씌운 값이 7만 원. 여기에 토양살충제 한 포 1만 1000원, 제초매트 고정핀 1만 6700원이 들었다. 도합 17만 8700원이다. 제초매트는 동네에서 쓰고 버린 것을 주워다가 써서 비용이 들지 않았다. 제초매트까지 샀다면 30만 원을 훌쩍 넘겼을지 모른다.

참깨를 수확하던 날. 마음 단단히 먹고 밭머리에 서서 수확을 준비하는데, 동네 어르신들이 지나가다가 서서 감평을 해주신다.

“동네에서 이 집 참깨가 제일 잘 됐어.”

그 말씀을 들으니 얼마나 어깨가 으쓱하던지. 웃음을 참을 수가 없어 입꼬리가 내려올 줄 몰랐다.

“지금 베려고 해요. 지금 베면 되겠지요?”

내 물음에 동네 어르신은 “내가 보니까 오늘은 조금 이르고 한 사나흘만 있다가 베면 좋은데” 하셨다.

“그럼 일주일 더 있다가 다음 주 토요일에 벨까요?”하니 일주일은 너무 길어서 안 된다면서 “딱 사나흘 후라야 한다”라고 하시는 게 아닌가.

사나흘을 기다렸다가 참깨를 베고 갈 여유가 되지 않은 까닭에 과감히 사나흘 빠른 수확에 돌입했다.

바닥에 방수포를 깔고 그 위에 참깨를 베어다 쌓아놓았다. 사진=김효원

올해로 두 번째 맞이하는 참깨 수확이지만, 여전히 낯설고 서툴다. 작년에 어떻게 했더라, 머리를 굴려보아도 잘 떠오르지 않아 낫, 가위, 양손 전지가위를 모두 가지고 나와 참깨를 잘라보았다. 해보니 한 명은 참깨를 잡고 있고 한 명은 양손 전지가위로 자르는 것이 가장 수월했다. 작년에도 이렇게 했던 것 같은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참깨를 양손 전지가위로 자를 때 꽤 충격이 가해지기 때문에 익은 참깨 꼬투리가 벌어지면서 참깨가 쏟아진다. 참깨를 자를 때 떨어지는 참깨가 아까와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참깨 단을 묶어 놓는 과정에서도 꽤 많은 깨가 쏟아진다. 사진=김효원

“깨가 쏟아진다”는 관용어가 있다. 흔히 신혼부부가 서로에 대한 사랑이 차고 넘칠 때 쓰는 표현이다. 이때 쏟아지는 깨는 분명히 참깨다. 들깨는 씨방이 의외로 단단해 여간해서는 쏟아지지 않는다. 이에 비해 참깨는 조금만 손을 대도 깨가 쏟아져 나온다.

깨를 베었으면 이제 단을 묶을 차례다. 단을 묶어 비 맞지 않는 곳에 세워 잘 말려야 썩지 않는다. 마당에 놓인 평상에 깨를 세우고 비닐을 잘라 지붕을 만들기까지 꼬박 1박 2일이 걸렸다. 엄마와 나, 여동생까지 3명이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 쉴 새 없이 일했는데, 내 일이니까 이렇게 하지, 누가 시켰으면 분명 노동착취라고 노동청에 신고했을 거다.

단을 묶어 세워둔 참깻단에 깻망아지가 매달려있다. 깻망아지는 참깻잎을 먹고 자라 박각시나방이 된다. 사진=김효원

단을 묶고 난 후 깔개 위에 떨어진 참깨를 쓸어 모았다. 그것만 해도 두 됫박 정도가 됐다. 이 작은 알갱이를 얻기 위해 몇 달을 애쓰고 땀 흘렸다고 생각하니, 참깨 한 숟갈의 값어치가 새삼 묵직하게 다가왔다. 시장에서 아무렇지 않게 사던 한 봉지 참깨에는, 사실 수많은 농부의 노동과 기다림이 담겨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갓 수확한 참깨를 볶아 절구에 찧었더니 고소한 향이 코끝을 자극하며 퍼져 나갔다. 그 향만으로도 올여름의 수고가 다 보상받는 것 같았다.

사실 참깨 농사를 짓는데 들어간 비용을 생각하면 참깨를 사 먹는 것이 싸다. 재료비만 17만 8700원이지, 인건비며 교통비까지 더하면 무척 비싼 참깨다. 사서 고생이란 말이 딱 들어맞지만, 올해 참깨 농사를 직접 지어보지 않았다면 몰랐을 교훈을 얻었다.

참깨의 작은 알갱이 속에 햇살과 바람, 그리고 농부의 시간, 그런 것들이 차곡차곡 담겨있다는 사실. 고통을 견뎌내야 향기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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