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사리 #자아 #에고고프로젝트
무한도전도 아닌데 혼자 진행하는 장기 프로젝트가 있다. 바로 독립. 가족이라는 든든한 둥지를 벗어나 세상살이를 피부로 느껴보고 한 단계 성장하는 것이 목표다. 다만 아직은 돈도, 용기도 부족하다. 언제부터 나는 홀로서기를 꿈꿨던 걸까. 2020년 1월 22일에 끼적였던 글을 가져왔다.
가끔 홍대병이 발병할 때가 있다. 극장 혹은 서점을 가 남들이 읽지 않을 법한 영화/책을 찾는다. 절대 남들이 쉽게 접할 수 없는 작품이어야 한다. 베스트셀러만 찾는 몽매한 이들과는 다르다는 뿌듯함에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고상함이 적절히 차올랐을 즈음 홀로 길을 걷는다. 이어폰을 꽂고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할 시간이다. 걷다보니 눈가가 촉촉히 젖어있다. 그때 SNS에 감성글을 올린다. 좋아요가 달린다면 그야말로 화룡점정이다.
지난 일요일이 그런 날이었다. 필기시험을 마치자마자 곧장 상암에 있는 한국영상자료원을 찾았다. 독립영화 특별전을 열고 있단다. 이때다 싶어 두 편이나 예매했다. 그중 하나의 제목은 <내가 사는 세상>이었다. 얼마나 좋은 세상에서 살길래 영화까지 만드는 걸까. 그새 찾아온 질투심과 함께 상영관으로 들어갔다.
간략하게 영화를 소개하자면, 정과 법 사이 기로에 서있는 청춘들의 이야기다. DJ를 꿈꾸는 남자 주인공 민규는 낮에는 퀵서비스, 밤에는 클럽에서 일하며 빛 볼 날을 기다리고 있다. 허나 퀵서비스는 월급이 덜 들어오고, 클럽 사장 역시 친분을 빌미로 금전 문제를 '퉁치기' 일쑤다.
어느 날 호구가 되지 않기로 결심한 민규는 두 사장에게 근로계약서 작성을 요구하며 사건이 벌어진다. 혹시나 찾아볼 사람들도 있으므로 더 자세한 설명은 패스.
보면서 지금 내가 사는 세상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색이 4대 회계법인인데 근로계약서 한 장 안 쓰고, 오자마자 일부터 시키고, 계약서 얘기 꺼내면 얼굴 한 번 안 보이는 회계사 핑계 대며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세상말이다.
심지어 지난달에는 출장비 잘못 계산해 월급이 덜 들어왔다. 일도 많고 야근도 해야해 불만이 가득할 때면, 눈치 하나는 빨라서 팀장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표정으로 사정사정을 한다. 앓는 소리에 부탁을 거절하기도 그렇고 해서 결국 모가지 휘도록 서류를 검토한다. 나부터가 정과 법 사이에서 오락가락하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민규가 부러웠던 순간이 있었다. 여자친구인 시은이 잠시 자고 있던 민규 자취방에 찾아와 함께 껴앉는 장면이다. 비록 돈 몇 푼 아끼려 국수를 먹는 가난한 연애를 할 지라도, 각자의 꿈을 위해 노력하고 서로 사랑하는 모습이 너무도 좋게 보였다. 나도 저런 사랑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괜히 부러워서 상암동을 크게 한 바퀴 돌 정도로.
물론 지금 여자친구가 있다. 굉장히 잘 만나고 있다. 다만 항상 남의 떡이 커보이고, 나는 한없이 동정받고 싶은 게 우리네 인생사 아닌가. 4000원짜리 국수에도 히히덕 거리는 영화 속 연애는 아름답지만, 세숫대야 냉면이랑 왕돈까스 하나씩 나눠먹는 나의 연애는 웃음기 하나 없는 다큐다.
내 욕심 때문에 더 잘 못해준 것만 같아 아쉬움만 가득하다. 서로 꿈을 위해 달려간다며 공부만 하다보니 20대가 지나버렸다. 무엇보다 난 자취를 하지 않는다. 애인이 언제든 들락날락하는 청춘들의 연애, 졸라 부럽다. 밥은 챙겨먹고 다니냐는 엄마의 잔소리가 싫어 곧장 방으로 들어가는 나로서는. 이따가 집에 들어가면 분리수거부터 해야한다. 분리수거하는 장면은 영화에 잘 안 나오지 참.
그렇게 추운 날씨에 길을 쓸쓸히 걸으면서 판타지에 대해 고민해봤다. 글이 됐던, 영화가 됐던, 심지어 미술 작품이든 보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나도 저렇게 살아보고 싶다"는 말을 듣는 것만큼 좋은 칭찬이 어디있을까 하는 고민. 설령 <내가 사는 세상>처럼 불쌍한 청춘들의 이야기를 다루더라도 부럽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으니까.
<검사내전>, <스토브리그> 등 대다수의 시청자들은 못 겪어봤지만, 그렇기에 느껴지는 동경의 감정. 이를 얼마나 잘 구현하는가가 만드는 이의 실력 아닐까. 작문도 그렇게 써야 하지 않을까.
나 역시 판타지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 등 뒤가 따가울 정도로 지나가는 이들의 동경심을 한껏 받는, 기왕이면 백마탄 왕자로. 그런 마음이 커질수록 내 자신은 너무도 작게 보인다. 나에게 과연 잘난 구석이란 게 있기는 한 걸까. 없지는 않을 테다. 하지만 직업이 없으니 소용없다. 백날 잘난 체하면 뭐하나. "지구가 네모다"라고 해도 그럴싸한 타이틀이면 신빙성이 생기는 세상인데 말이다.
멋있게 살고 싶다. 정말로. 과한 욕심만 버리면 적당히 행복하게 살 것 같은데. 왜 그러지를 못하는 걸까. 답답한 요즘이다. 누가 나를 카메라로 찍어주지도 않으니 말이다. 내 인생 자체가 남들에게 판타지를 주지는 못할 지라도, 누군가에게 설렘을 안겨주는 글은 써보자고 다시 한 번 다짐해본다. 그렇게 하나하나 기록해나가면 뭐든 얻어걸리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