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왕성 #자아 #에고고프로젝트
해마다 버킷리스트를 쓴다. 벌써 3년째. 이루지 못해서 이월된 버킷리스트 항목이 있다. 바로 '한라산 등반하기'. 글쎄. 모름지기 30년을 넘게 살았으면 한라산 한번 올라봐야 하지 않나, 하는 요상한 결심이었다. 남들 체력의 60%면 감사할 수준인 나는, 체력장을 정말 싫어했다. 그 많은 종목들 중에서 단 한 군데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유연하지도 않고 민첩하지도 않았다. 그나마 위안이 됐던 건 '오래 달리기' 완주. 겨우 주어진 바퀴 수를 채우고 들어오면 말 그대로 심장을 토해낼 것 같았는데. 어쨌거나 매듭을 지었다는 게 좋았다. 헉헉대며 땀 흘리는 나 자신도 멋지게 느껴지고. 좀 많이 과격한 엔딩 요정 같았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
성인이 되어서도 저질체력은 변하지 않았다. 체력 제로, 운동신경 제로. 잘 못하니까 부러 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나마 취미처럼 했던 운동이라곤 '달리기'였다. 한강 근처에만 10년쯤 살았던지라. 맥주를 맛있게 마시려고 종종 밤 달리기에 나섰다. 왕복 6km. 조금 달렸다가 걷고, 다시 뜀박질의 반복. 오랜 고시생활의 답답함을 해소해주는, 유일하게 건강한 방식이었다.
2019년. 제주에서 처음으로 다랑쉬오름(382m)에 올랐다. 정상까지 올랐던 건 아닌 것 같고, 정상 목전에서 한참 앉아 쉬다가 내려간 걸로 기억한다. 코로나가 활개 치기 전이라, 마스크 없이 올랐다. 가뿐했다. 다리도 안 아팠다. 땀은 조금 났지만 금방 바람이 말려주었다. 아래로 아끈다랑쉬가 보였고, 네모난 푸른 밭과 사이사이 좁은 길, 저 멀리 수평선도 보였다. 지상에 아등바등 품고 살았던 문제들이 레고 장난감처럼 작고 귀여워 보였다. 위에서 보면 아무것도 아닌 건데. 그렇게 내려가면 당분간 버텨낼 힘이 생겼다.
그래서 겁도 없이 한라산을 꿈꾸기 시작했다. 성산일출봉(182m)은 언제나 선두로 올랐고, 다랑쉬오름(382m)도 너끈히 올랐으니까. 아뿔싸, 그런데 작년 가을. 지미봉(165m)에서 낙담하고 말았다. 중간에 몇 번이나 포기할까 고민하면서 멈춰 섰다. 아무리 KF94를 썼다지만! 마스크 한 장으로 그렇게 차이 날 수 없었다. 다른 일정을 소화하고 오후에 간 것도 영향을 줬으려나? 모르겠지만 정말 너무 힘들었다. 내려갈 땐 이미 다리가 후들거려 넘어지지 않으려 발가락에 힘 꽉 주고 내려갔다. 한라산(1947m)... 한동안은 꿈도 꾸지 말자! 그렇게 외면하고 싶었지만..
2022년 버킷리스트에 또 넣고 말았다. 겁도 없이. 스스로에게 묻는다. 도대체 산은 왜 오르는 건데? 풍경이 좋아서라면 차로 갈 수 있는 곳에 가거나 케이블카를 타면 되잖소! 하지만 그런 걸로는 해소되지 않는다. 끈질기게 바닥만 보고 올라 탁 트인 전경을 볼 때의 그 희열! 목선을 타고 흐르는 땀줄기를 달래주는 바람! 바람에 지저귀는 잎 소리! 그런 것들에 중독되고 마는 거다. 지상에 두고 온 것들을 주기적으로 훌훌 털어줘야 하니까.
지난 주말. 아차산(295m)에 올랐다. 쓰고 있던 KF94는 잠시 벗어두고, 덴탈 마스크를 착용했다. 토레타 한 병, 젤리 하나 쥐고 처음으로 친구들과 함께 올랐다. 서로 사진 찍어주고, 하산 후 어느 막걸리 집에 갈지 찾아보느라 특별한 감상을 느낄 순 없었다. 먹다 남은 지렁이 젤리처럼, 일상의 근심을 반쯤 접어 넣고 되돌아온 느낌. 함께라 덜 겁났지만, 역시 정상에선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이번 주말엔 남산(270m)에 오른다. 한라산... 올해엔 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