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어리

#송사리 #자아 #에고고프로젝트

by 에고고 프로젝트

첫 번째 직장은 직원이 10명을 겨우 넘는 소기업 중에서도 소기업이었다. 그러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중견기업을 각각 두 번째, 세 번째 직장으로 맞게 됐다.


두 번째 직장에 가자마자 놀랐던 것은 다이어리였다. 회사 로고가 표지에 각인되고, 내부를 펼치면 사시, 사훈으로 시작해 창립기념일이 적힌 달력과 전국 사업장 전화번호로 끝나는 그 다이어리. 입사 첫 날부터 주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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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내가 드디어 회사다운 회사를 만났구나! 괜히 기뻐서 다이어리를 품 안에 꼬옥 껴안았다. 다이어리만이 유일한 장점이었던 건 안 비밀. 그렇게 다른 회사에 들어가 다이어리를 한 번 더 받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 발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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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다니는 직장은 다이어리를 만들지 않는다. 크기가 작은 회사란 얘기. 다만 임원께서 각자 '공책'을 들고 있는 꼴을 보고 한숨을 쉬더니, 여기저기서 받은 다이어리를 나눠줬다. 제일 무거운 것이 나한테 떨어졌다. 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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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다이어리를 받았지만 폼으로 들고다녔다. 메모를 할 만큼 중요한 내용이 아닌 경우가 많은데다, 당장 적는 것보다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한 마디로 내 머리를 과신한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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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언제부턴가 깜빡한 내용이 생기는 과부하가 찾아왔다. 또 같은 말인데도 사람마다, 심지어 말한 사람과 들은 사람이 이해한 내용이 다른 경우가 발생했다. 그 경우엔 기록을 남기는 자가 승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말한 내용을 다 받아적는 것은 물론 실없는 소리조차도 일단 다 적었다. 다시 안 펼쳐서 문제지.


어쨌든 계속 적다보니 5달만에 2022년 다이어리를 꽉 채우고 말았다. 당장 출근하려고 가방싸는데 그 사실을 발견. 한숨을 쉬고 일단 책상을 바라봤다. 다이어리가 여럿 있기는 한데.. 그렇다고 전직장 다이어리를 들고 갈 수는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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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눈에 띄는 다이어리를 집었다. 표지를 보자마자 왜 익숙했던지 알겠더라. 한참 취준생 시절 가장 가고싶었던 회사 다이어리였다. 그 다이어리를 쓰면 왠지 그 회사에 닿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미신으로라도 간절했던 때가 있었지. 갑자기 시계를 4년 전으로 되돌리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진짜 시계는 이러다 지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당장 방법이 없으니 이거라도 들고갈까. 일단 펼쳐봤다. 깜지 가득한 기록이 눈앞에 있었다. 시험을 준비하느라 새끼손가락이 까매지도록 필기를 반복하던 때가 있었지. 참지 못하고 울컥하고 말았다.


그는 그래서 미련을 접기로 했다. 은퇴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집에서 잠을 자다 한밤중에 일어났는데, 침대 밑에 있는 아령을 들고 무의식적으로 내가 재활훈련을 하고 있었다. ‘지금 내가 뭐하고 있지?’라는 생각이 들더라. 이성적으로는 이미 은퇴를 결심했는데, 내 안에 있는 나는 도전하라고 채찍질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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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마흔에도 도전이라는 선택을 하곤 한다. 30대 초반인 송사리만 해도 1년 전에는 꿈이란 단어에 참 설렜었단 말이지. 더는 직장을 전전할 수 없어 누구보다 현실적으로 살아보려고 아등바등하고는 있다. 그말이 곧 꿈을 단념하고 살라는 말은 아닌데. 그래서 유독 울컥했었나보다. 정신차리고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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