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의미를 찾는 이들에게 <빅터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왜 사는가?’라는 물음. 보편적인 답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하게 되는 질문입니다. 이 근본적인 물음에 답을 구하고자 사람들은 신학, 철학, 예술 등을 통해 인간의 존재 이유를 탐구해 왔습니다. 여전히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답은 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만 사람들은 여전히 ‘왜’ 살아야 하는지 알고 싶어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법륜스님은 ‘사람이 왜 사는 걸까요?’라는 물음에 ‘풀이 자라는 데, 토끼가 자라는 데 이유가 없는 것처럼 사람도 그냥 사는 것이다. 왜 사느냐 묻지 말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물어보라’고 대답을 한 적이 있습니다. 김상용 시인도 <남으로 창을 내겠소>라는 시에서 “왜 사냐 건 웃지요”라며 답이 없는 물음에 웃음으로 대답했습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했던 비트겐슈타인의 태도와도 상통하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가는 이유를 찾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공허함을 느낄 때, 소중한 무엇 혹은 누군가를 잃었을 때,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열망하던 것을 얻고 난 후에도 왜 살아야 하는지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자신의 용도가 다한 것 같은 생각이 드는 노인들에게, 열정은 넘치지만 열정을 쏟아부울 곳을 찾지 못하고 있는 젊은이에게도 왜 사는가라는 물음이 자연스레 솟아납니다.
어떤 이들은 이런 고민 속에 괴로워하다 끝모를 우울에 빠져 상담가를 찾거나 심한 경우엔 병원을 찾아가기도 합니다. 저의 경우 예기치 않게 병에 걸리고 나니 삶의 의미에 대해 더 생각해보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이와 같은 주제를 다루는 책들을 전보다 더 많이 찾아보게 됩니다. 투병하며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으며 삶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 보았습니다.
책의 저자 빅터 프랭클은 악명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서문에서 “어떤 상황에서도, 심지어는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도 삶이 잠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구체적인 예를 통해 전달”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밝혔습니다. 살면서 저자와 같은 극단적인 상황은 아니어도 감당하기 벅찬 상황을 맞게 되는 때 살아가는 이유를 찾는데 이 책이 조금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강제 수용소에서 얻은 결론
빅터 프랭클 박사는 강제 수용소에서의 개인적 체험을 통해 수감자들의 삶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보여줍니다. 수감자들은 처음엔 지독한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모든 것에 대한 혐오와 무감각 상태에 이릅니다. 박사 자신도 옆 사람들이 죽어나가도 그것이 일상이 되어 시체를 바라보면서도 식사를 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무뎌지지 않으면 극심한 환경을 견딜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저자는 수용소라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극단적 상황에서도 버텨내는 수감자들의 모습에 초점을 맞춰 수용소의 체험을 기술했습니다. 지적인 활동을 통해 감수성을 키워왔던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할 수 있는 사람들, 수용소 안에서도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 사물을 유머러스하게 보려는 사람들 등은 도처에 고통이 만연한 수용소에서도 내면을 지켜나갔다고 저자는 썼습니다.
물론 위와 같은 사소한 행복들은 진정한 의미의 행복은 아니었음은 당연합니다. 대부분의 수감자들은 상황에 지배당해 이와 같은 사소한 행복들을 느낄 여유는 없었습니다. 대체로 수감자들은 운명에 지배당한다는 두려움에 스스로 어떤 결정을 내리기를 기피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을 보며 빅터 프랭클 박사는 ‘인간은 주변 환경에 지배당해 아무런 정신적 자유를 갖지 못하는지, 수용소와 같은 환경에서 인간은 자기 행동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없는 것인지’ 의문을 품습니다.
극소수이기는 하지만 수용소에서도 타인을 위로하거나 자신의 것을 나누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음을 확인하면서 빅터 프랭클 박사는 “수용소에서도 사람이 자기 행동의 선택권을 가질 수 있다. 가혹한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를 받는 그런 환경에서도 인간은 정신적 독립과 영적인 자유의 자취를 간직할 수 있다”고 결론내립니다. 어찌보면 매우 희박한 사례를 가지고 내린 결론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인간이 상황에만 지배되지는 않는다는 가능성을 강조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 있어도 단 한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중략) 수면부족과 식량부족 그리고 다양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는 그런 환경이 수감자를 어떤 방식으로 행도하도록 유도할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최종적으로 분석을 해보면 그 수감자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그 개인의 내적인 선택의 결과이지 수용소라는 환경의 영향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난다.”(본문 인용)
이와 같은 결론을 언뜻 보면 사회 구조적인 실패로 인한 개인의 실패를 전적으로 개인의 선택 혹은 의지 없음으로 돌리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부분은 상황에 놓인 인간이 반드시 상황에 지배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저자는 이와 같은 체험을 통해 ‘그렇다면 무엇을 통해 인간의 내적 자율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답하고자 합니다.
살아가는 이유를 어떻게 찾을까
저자에 따르면 사람이 삶에서 겪게되는 시련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가 인간의 내적 자율성을 판단하는데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미래에 대한 기대가 있어야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점입니다. 빅터 프랭클은 미래에 대한 믿음의 상실은 죽음으로 이어졌다고 말했습니다. 삶의 의미를 찾는데 실마리가 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강제수용소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성취할 수 있는 인생의 진정한 기회는 자기들에게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지 않았다. 그곳에도 기회가 있고, 도전이 있었다. 삶의 지침을 돌려 놓았던 그런 경험의 승리를 정신적인 승리로 만들 수도 있었고, 그와는 반대로 그런 도전을 무시하고, 다른 대부분의 수감자들처럼 무의미하게 보낼 수도 있었다.”(본문 인용)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요? 빅터 프랭클 박사의 접근 방식도 기본적으로 법륜 스님이나 김상용 시인의 태도와 유사합니다. 저자도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시간마다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말이나 명상이 아니라 올바른 행동과 올바른 태도에서 찾아야 했다”고 말합니다. 저자는 사랑하는 이, 혹은 아직 완성하지 못한 일에 대한 책임감을 강조합니다.
빅터 프랭클 박사는 수용소의 체험을 바탕으로 미래에 환자가 이루어야 할 과제가 갖고 있는 의미에 초점을 맞춘 로고테라피라는 기법을 만들었습니다. 저자는 인간이 존재하는 동력을 “자신의 삶에서 의미를 찾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봤고, 인간 존재의 본질을 “책임감”에서 찾았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삶의 의미는 인간의 내면이나 그의 정신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로고테라피에 의하면 우리는 삶의 의미를 세 가지 방식으로 찾을 수 있다. 1)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2)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선, 진리, 아름다움 등을 체험, 자연과 문화를 체험, 다른 사람을 유일한 존재로 체험 즉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 3)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삶의 의미에 다가갈 수 있다.”(본문 발췌 인용)
다만 주의할 점은 시련에 대한 관점입니다. 시련이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의미를 발견하고자 굳이 시련을 겪을 필요는 없다는 점입니다. 빅터 프랭클 박사는 “단지 시련속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불필요하게 고통을 감수하는 것은 자기 학대에 불과하다.”고 강조합니다.
인간을 어떤 존재로 보느냐가 관건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공허감, 육체적/정신적 고통, 삶의 유용성을 상실한 느낌 등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저자는 “비극 속에서의 낙관”이라는 관점으로 인간 존재를 정의합니다. 즉 인간이 ‘고통을 성취로, 죄를 자기 발전의 계기로 삶을 수 있고, 일시적인 삶에서도 책임감을 가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저 역시 이 관점에 동의합니다.
“인간은 조건 지어지고 결정지어진 것이 아니라 상황에 굴복하든지 아니면 그것에 맞서 싸우든지 양단간에 스스로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존재이다. 인간은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존재할 것인지 그리고 다음 순간에 어떤 일을 할 것인지에 대해 항상 판단을 내리며 살아가는 존재이다.”(본문 인용)
‘왜 살아야 하지?’ 고민하고 있는 분들이 있다면 강제수용소에서도 삶의 의미를 잃지 않고 아직 이루지 못했던 미래에 대한 책임감을 간직하고 살아 돌아온 빅터 프랭클 박사의 조언을 따라가 보면 어떨까요? 저자는 우리의 삶을 영화에 비유했습니다. 저도 요즘 겪는 시련을 영화에서 고통스런 한 장면을 지나고 있는 것이겠구나 여겨보려 합니다.
“영화는 수천 개의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각의 장면에 다 뜻이 있고 의미가 있지만 영화의 전체적인 의미는 마지막 장면이 나오기 전까지는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를 구성하고 있는 각각의 부분, 개별적인 장면들을 보지 않고서는 영화 전체를 이해할 수 없다. 삶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본문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