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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 Han Sep 10. 2019

카사블랑카 -북 아프리카 모로코

아프리카 모로코 



카사 블랑카  - 1940년대식의 영화로도유명하지만 14-16세기에 걸친 이베리아 반도의 패권 전쟁에서도 중요한 지점 이었던 모로코의 경제 도시 중 하나 이고 아프리카 주요 도시 중 수위권 안에 드는 젋음 도시 이다.. 


지브롤터 해협을 사이에 두고 스페인과는 불과 페리로 1시간 전후 이면 도달 하는거리이다. 우리가 아는 아프리카 몬수운 열대 기후와는 다른 7월 8월 의 날씨 임에도 약간의 선선 함이 있다.. 


여기에도 개발 붐이 일어서 도심지 부근과 상업지 부근은 부동산 가격이 가파르게 상승 하였다고 하니 일자리 수요과 졍제적 힘이 몰리는 지역은 지구상 어디든지를 막론하고 관심있게 볼 일이다.. 


다시 카사 블랑카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Wikipedia를 통해서 보도록 하자. 



الدار البيضاء 



카사블랑카의 모습 





보다시피 현제의 도시 풍경이고 우리나라의 약 60- 70년대의 거리 모습을 보는 듯 하다. 젊은 사람들이 많은 인구 탓과 기질 성향이 급해서 교통 신호 쳬게를 무시 하고 달리는 차량들이 많아서 외국인들은 조심 하여야 한다. 

아래 도표들은 모로코의 인구 증가률과  현황 이다 절은 인구의 도시 유입으로 점차 활기를 띄고는 있으나 기반 산업은 많이 취약한 편이다..  



카사블랑카

북위 33° 32′ 00″ 서경 7° 35′ 00″ / 북위 33.533333°  서경 7.583333°  / 33.533333; -7.583333

좌표

북위 33° 32′ 00″ 서경 7° 35′ 00″ / 북위 33.533333°  서경 7.583333°  / 33.533333; -7.583333


         

              행정구역                

그랑 카사블랑카 

역사 

              설립                

1756 

인구 


              인구                

3,359,818 명 (2010년) 

              인구밀도                

9,132 명/km2 

              광역인구                

4,270,750 명 

             면적                

324 km2 


카사블랑카(베르베르어: ⴰⵏⴼⴰ, 스페인어: Casablanca, 아랍어: الدار البيضاء, ad-Dār al-Bayḍāʼ / 모로코 아랍어로는 ed-dar el-Biḍa 앗다르알바이다[*])는 대서양에 위치한 모로코의 최대 도시이다. 위도는 33°32′N 7°35′W.에 있다. 도시 이름은 스페인어로 "하얀 집[1]"을 뜻한다. 


약 330만 명의 인구를 보유한 카사블랑카는 모로코의 주요한 항구일 뿐만 아니라 모로코에서 가장 규모가 큰 도시이기도 하다. 또한 마그레브 내에서도 가장 큰 도시이며, 아프리카 대륙 전체 기준으로는 여섯 번째로 큰 도시이다.[출처 필요] 모로코의 실제 수도는 라바트이지만 경제와 무역의 중심지는 카사블랑카로 여겨진다. 


카사블랑카에는 또한 모로코 내 굴지의 기업들과 그곳에 진출해 있는 외국 기업들이 본사와 주요 산업 시설들을 두고 있다. 그리고 산업 통계를 보면 카사블랑카가 모로코 내에서 산업 중심지로서 오랜 세월 동안 역할을 담당해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밖에도 카사블랑카에는 왕립 모로코 해군이 주둔한 제1기지가 있다. 그리고 카사블랑카 항구는 인공 항구 중에서 마그레브와 북아프리카에서 가장 가장 크고[2] 세계에서도 가장 큰[3] 축에 속한다.

               

프랑스 보호령 전[편집]


오늘날 카사블랑카 지역은 적어도 7세기 까지 베르베르인들이 정주했었다.[4] 당시 안파로 이름지어졌던 그 지역에 작은 독립왕국이 아랍 무슬림 지배에 대한 응답으로 그 지역에 생겨났으며 1068년 알모라비드 왕조에 의해 정복될때까지 지속되었다. 



     위성으로부터 보여지는 카사블랑카

14세기 동안, 마리니드 왕조에 속하는 안파는 항구로서 중요한 지위속에 떠올랐다. 15세기 초기, 그 마을은 다시 한번 독립 국가가 되었으며 해적과 선원들을 위한 안전한 항구로서 알려졌으며, 1468년 마을을 파괴했던 포르투갈인들에의해 목표가 되도록 이끌었다. 


포르투갈인이 1515년 군대 요새를 세우기 위하여 안파의 폐허를 이용했다. 그곳 주변에서 자라났던 그 마을은 포르투갈어로 "하얀 집"을 뜻하는 "카사 블랑카"로 불렸다. 


1580년과 1640년 사이, 카사 블랑카는 스페인의 일부였으며 후에 그곳은 다시 포르투갈의 지역이 되었다. 유럽의 식민주의자들이 그 마을의 대부분을 파괴했던 수반된 지진이 일어났던 1755년 완벽하게 그 지역을 단념했다. 


그 마을은 이말리 이븐 샤리프의 손자인 술탄 모하마드 벤 압달라 (1756년 ~ 1790년)에 의해 재건되었다. 그 마을은 아랍어로 الدار البيضاء ad-Dār al-Bayḍāʼ (하얀 집)과 스페인어로 '카사 블랑카로 불리었다. 


19세기 그 지역의 인구는 카사블랑카가 영국에서 붐이 일어나는 직물 산업에 양모의 주요한 공급처가 됨에 따라 성장하기 시작했으며 선적 수송량이 증가했다. (그 대신에 영국은 모로코의 현재 유명한 국민 차인 주차 (珠茶)를 수입하기 시작했다.) 1860년대 까지, 약 5,000 명의 거주자가 있었으며 인구는 1880년 후반까지 대충 10,000명까지 성장했다.[5] 카사블랑카는 프랑스의 정복과 1906년에 술탄령안에 최초의 통치자로 그 마을에 프랑스 식민주의자의 출현의 몇 년안에 12,000여명에 도달한 인구와 함께, 알맞게 규격화된 항구로 남았다. 1921년까지 이곳은 판자촌 개발을 통하여 110,000명[6]까지 올라갔다. 



  카사카블랑카 중심부에 있는 파리 대로의 경치


1907년 6월, 프랑스가 항구 근처에 묘지를 통하여 지나가는 경편철도 (軽便鉄道)를 건설하려는 시도를 했다. 거주자들은 프랑스인 노동자들을 공격했으며 폭동이 일어났다. 프랑스 군대가 질서를 회복하기 위하여 상륙했으며 군대는 마을에 심각한 피해를 준 뒤 목적을 완수했다. 당시 프랑스는 카사블랑카를 장악했다. 이것은 비록 프랑스의 카사블랑카 지배가 1910년까지 공식화되지 않았을지라도 식민지화의 과정을 효과적으로 시작했다. 


유명한 1942년의 영화 카사블랑카가 경합하는 유럽 열강들 사이 세력의 무대로서 그곳을 묘사하는 그 당시 시의 식민 상태를 나타냈으며 그 지역 주민에 대하여 약간의 언급과 함께 상연되었다. 그 영화의 방대한 전 세계적인 캐릭터 배역 (미국인, 프랑스인, 독일인, 체코인, 노르웨인인, 불가리아인, 러시아인, 다소의 다른 국민)은 유일한 단하나의 아랍인 캐릭터, 변두리 역할의 도어맨 "압둘"을 포함한다. 


1940년대와 1950년대 사이, 카사블랑카는 반프랑스 폭동이 일어나는 주요한 중심이었다. 


카사블랑카 회담[편집]


카사블랑카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중요한 전략적인 항구였으며 1943년 윈스턴 처칠과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전쟁의 진행을 토론했던 카사블랑카 회담을 주최했다. 카사블랑카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유럽의 작전 현장 (European Theater of Operations)을 위하여 모든 미국의 항공기가 작전을 행하는 지역이었던, 규모가 큰 미국 공군기지의 소재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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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사블랑카 도심 풍경 .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전에 영화화 했던 카사블랑카 OST 를 들어 봅니다. 


https://youtu.be/8SwM9L061E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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