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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 Han Aug 02. 2023

니체 - 노회찬 ;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1961 



5년 만에 찾아온 ‘인간적인 정치인’ - 시사저널 (sisajournal.com)



불가근불가원의 정치적 동지가 풀어낸 《노회찬 평전》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 문호 톨스토이의 이 말이 갈수록 그리운 것은 사람의 느낌을 지닌 정치인을 보기 힘들기 때문일 수 있다. 2018년 여름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난 노회찬이 그리운 모습으로 찾아왔다. 동지이자 비판자인 이광호 ‘진보정치’ 편집장이 쓴 《노회찬 평전》은 정치가 노회찬보다 그가 가진 인간적인 모습이 도드라진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 일, 그것을 가로막는 부당한 억압과 착취를 근절하기 위해 싸우는 일이 노회찬의 직업이었고, 바탕에는 인간 사랑, 휴머니즘이 있었다. 그의 휴머니즘은 사회적 조건이나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초역사적 이념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구체적 현실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휴머니즘이었다.”



이번 평전의 탄생에는 노회찬이 떠난 그 겨울에 설립된 추모 재단의 모임부터 5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 시간은 허투루 지나가지 않고, 지인들의 인터뷰, 기록의 복기 등을 통해 알차게 채워지는 시간이었다.


노회찬의 정치 여정보다 인간적인 모습에 주목



쉽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성격으로 인해 갈등도 많았던 부인 김지선씨에게 1998년 썼다는 편지(231p)는 아내에게 진심이었던 노 의원의 진면목을 느끼게 하는 깊은 글이다. 부부 사이에 아이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아내를 사랑하는 그의 진심을 읽을 수 있다. 반면에 진보정의당 창당을 준비하던 2012년 10월에 쓴 ‘6411번 버스 연설’은 그가 같이하고 싶은 사람들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는 글이다. 새벽 4시에 구로에서 강남으로 운행을 시작하는 이 버스의 첫차를 가득 메우는 건물 청소노동자들의 삶을 공감하는 그의 글에는 울림이 있다.



안타깝게 막을 내린 노회찬의 정치 여정을 보면 우리 정당사에 나타난 변화를 한눈에 알 수 있다. 성공적으로 막을 올린 노회찬의 정치는 기득권 정당으로 올라타는 방식 등 편한 길이 있을 수 있었지만 노회찬은 정치의 초심을 잊지 않았다. 불가능할 것 같은 노동자 정당을 만들어냈지만,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이합집산하는 정당 구조의 회오리에 그 자신도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와중에 그는 삼성X파일 폭로나 전관예우 근절 등 정치 개혁을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하지만 변화하는 정치의 틀은 그를 옥죈다. 특히 2011년 통합진보당을 선택한 것은 자신에게 최악의 결과였다. 외형적으로는 심상정, 유시민, 이정희의 결합체였지만, 이미 내부는 경기동부연합이 중심이 된 당권파들이 주도하고 있었다. 외형적으로 2012년 4월 총선에서 13명의 의원을 배출하지만 내부 문제가 폭발하고, 갈등은 첨예화된다.



간난고초의 시간이 지나고 노회찬은 2016년 총선에서 창원 성산 국회의원으로 당선된다. 하지만 예비선거 당시 알고 지내던 드루킹 김동원과 고등학교 친구가 주도하던 경공모 모임에서 받은 4000만원이 그를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 더 딛게 하는 비극으로 몰아간다. 그는 유서를 통해 수없이 자신이 받은 돈을 정상적으로 회계 처리하지 못한 것을 사과한다. 저자는 사람의 부끄러움을 다는 천칭이 있고, 노회찬에게는 그 무게가 가늠할 수 없다고 말한다. 


정치가는 입으로 정치 한다고는 하지만 민초들을 위해 마음으로 행동으로 정치 하는 몇 안되는 사람으로 기억 하고픈 이유는 그가 마지막 양심으로 투서 와 유서를 남겨 놓고서도 자신에게 끝끝내 부끄러움이 남아 있었던 사실을 사후에라도 속죄할 정도를 걸으려는 마음에 있지 않았을까 ... 촌철 살인의 대명사로도 불리웠던 논쟁의 귀재 였던 그의 일대기가 한편으로 궁금 해지기도 하는 까닭은 어떤 면에서는  철학자 니체와도 너무나도 닮은 모습이랄까 ,,,  " 인건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  .. 초인이 되고자 하였던 그 철학자도 인간의 한계로 세속의 굴레는 벗어 나지 못하였던건 아니 였을까 합니다만 , 이 무더운 여름속 ,, 청명한 철학자의  한귀절이 읽혀지고픈 시간들 이다. 


모든 시간이 똑같이 흘러가지는 않고 , 비록 과학이 정해 놓은 시간은 일분 일초라도 더디거나 늦게 가지 않는 법칙 이지만 우리들의 생각과 기억과 몸과 마음은 늘상 나만의 시계를 가지고 있는 듯 하다.  우리들은 어떤 누구에게라도 상대적인 길고 짧음의 시간을 혹은 시간의 기억들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10년은 5분전이이 되기도 하고 ,  명멸하는 순간의 혹은 찰나의 강렬 했던 스토리가,  그 기억이 나의 10년을 좌우 하기도  한다.      Wrritten by E HAN 



참고 ;; 철학자 니체  



19세기에 활동했던 독일 철학자, 문헌학자. 그가 주장한 주요 철학적 사상에는 신은 죽었다[8]힘에의 의지[9]위버멘쉬[10][11]영원 회귀[12]운명을 사랑하라[13] 등이 있다.


특유의 급진적인 사상으로 생철학실존주의포스트모더니즘 등의 철학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현대 대륙 철학의 근간을 마련했다.[14] 마르크스프로이트비트겐슈타인과 더불어 현대 인문학 전반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철학자이기도 하다. 실제로 저명한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이 시대 지식인들이 얼마나 정직한지를 확인하려면 그들이 마르크스와 니체의 이론적 기여를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쉽게 말해, 마르크스와 니체의 영향력을 인정하지 않는 학자는 진실되지 못하다는 말로, 니체가 당대에 끼친 지성사적 영향력을 높이 평가한 발언이었다.[15][16]


특유의 공격적 비판으로 인해 오인되기도 하지만, 어떤 철학자보다 넓은 사상의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는 철학자이며 그의 저서는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극단적일 정도로 다양하게 해석되고 있다.[17] 그러한 까닭 중 하나는 니체 특유의 서술 방식이다. 그의 저작은 대부분 압축적이고 강렬한 아포리즘으로 이루어지며 논리적이라기보다는 문학적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남긴다.[18] 하지만 실제 성격은 온화하고 유머를 좋아했으며 사교성이 있었다고 한다.


똑같은 해석, 똑같은 설명, 누구나 똑같아져야 된다고 주장하는 종교, 도덕, 민주주의, 공산주의. 이런 것들은 결국 모든 것이 평범해져야 된다고 강제하며 문화를 따분하게 만들고 삶을 권태롭게 한다. 니체는 이런 사회가 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며, '책임감있는 개인'이 기존 사회의 가치관과 다른 가치를 추구하더라도 우리사회는 그것을 허용해주어야 된다고 주장한다. 사실 모든 인식은 누군가의 관점이며, 그런 점에서 기존 가치들도 누군가의 관점을 정당화한 것에 불과하다. 그것을 다른 개인에게 강제한다는 것은 그에게 자신만의 생각을 멈추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각각의 개인은 자신만의 가치를 찾아가는 해석에서 삶의 의욕을 느낀다. 그런 창조적인 해석에서 위대한 작품이 탄생하며, 그 결과물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권태에서 벗어난다. 그러므로 개인의 해석을 가로막지말고, 서로의 창조적인 해석을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된다고 니체는 주장한다. 그렇다면 '해석'이란 무엇인가? 모든 개인의 '살아있는' 해석은 누군가를 이기려고 하는 해석이며, 그것은 상대의 해석을 짓밟고자 하는 일종의 잔인하고도 교활한 지배욕이다. 그러나 짓밟기만 해서는 '창조적'이지 못하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 그 자신만의 가치를 만들어 나가야만 한다. 그래야 삶의 의욕을 되찾고 현재를 그 자체로 즐길 수 있다. 그래서 니체는 그것이 일종의 놀이라고 주장한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그리스 비극의 기원을 말한다.[41] 그리스 비극은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유래했다. 디오니소스 축제에 참가한 사람들은 포도주를 마시며 광란과 흥분의 욕구를 표출했는데, 사람들은 도취된 상태에서 자신의 개별성에 대한 의식을 상실하고, 흥분 상태의 축제 군중으로 스며들어 그들과 하나가 되어버린다. 이 흥분 상태의 집합체 안에서 다양한 환상과 이미지가 떠돌며, 하나로 융해된 사람들은 이런 환상과 이미지를 서로에게 감염시킨다. 그래서 디오니소스 축제에 도취된 사람들은 모두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체험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런 후에는 언제나 이 도취 상태에서 깨어나는 순간이 오기 마련이며, 이 순간이 되면 모두가 각자의 개별성을 되찾는다. 각성 상태로 돌아가는 이 과정은 어렵고도 위험한 상태이기 때문에, 이들을 도와주는 제의 과정이 발달하게 되는데, 디오니소스 축제 말미를 장식한 비극 상연은 다름 아닌 이 집단적 도취 상태로부터 현실의 일상적 삶으로의 이행을 돕는 제의였던 것이다.[42]



따라서 그리스 비극은 '도취적 음악'과 '명료한 형식'이 혼합된 것이다. 니체는 이를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설명한다. 아폴론은 형식명료성확고한 윤곽밝은 꿈, 그리고 무엇보다도 타인과 구별되는 개별화를 주관하는 신이다. 조각건축, 호메로스적인 신들의 세계서사시에 나타나는 정신, 이 모든 것들이 바로 아폴론적이다. 반면에 디오니소스는 해체열광황홀광란을 주관하는 사나운 신이다. 음악과 , 그리고 다함께 도취되어 하나가 되는 것이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다. 아폴론적인 예술의 매력은 구분하여 명료하게 하는데 있지만, 디오니소스적 예술에서는 경계가 유동적이어서 음악이나 춤, 혹은 다른 예술에 매혹된 사람은 그 거리감을 잃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 그 두 가지가 조화롭게 합쳐진 예술이 '그리스 비극'이다.[43] 그리고 그 둘의 융합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그 비극 무대에서의 '합창(코러스)'이다. 합창에서 일부 개인은 한동안 개별성을 유지하면서 집단적 합창에 대항해 자기 목소리를 가지려고 한다. 어찌보면 그것은 일종의 "불협화음"이다. 불협화음이란 게 원래 그렇듯, 이로 인해 무대 위 팽팽한 긴장 상태가 조성된다. 그러나 주인공들이 제각기 목소리를 내면서 합창에 벗어나고자 해도, 종내는 합창의 조화로 다시 섞여들어간다.[44] 이렇게 개인과 전체, 질서와 충동의 정서가 잘 조화된 것이 바로 그리스 비극이었다.



그런데 그리스 비극에 소크라테스가 영향을 끼치면서 그리스 비극은 점차 몰락한다. '선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의식되어야 한다'는 변증법적 소크라테스식 사유가 음악의 힘을 분쇄해버린 것이 가장 치명적이었다. 이제 흥분과 열정의 감정들은 사라지고 논리적인 계산이 무대를 지배한다. 무대 위에서는 더 이상 노래를 부르지 않고 토론이 벌어질 뿐이다. 무대 위의 사건은 그 비밀을 상실하며, 주인공들은 계산 착오로 인해 고통을 당한다. 비극적 근본 분위기는 어느새 다 사라지고 없다.[45] 그리하여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없어지고 아폴론적인 것만 남은 그리스 비극은 결국 역사속으로 사라졌던 것이다. 니체는 사라진 그리스 비극을 되살릴 적임자로 바그너를 지목한다.


신, 이데아, 물자체 등 불변하는 가상에 진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형이상학자들은 모든 가치들이 진리와 비진리로 대립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니체는 대부분의 생각들이 본능에 의해 은밀하게 인도되고 움직이므로, 우리가 평소에 상반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가치들이 사실은 대립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50] 어떤 명제, 착상, 영감 등은 대부분 그들의 마음속 소망이 추상적으로 변형된 선입견에 지나지 않는 것인데, 그것들은 나중에 찾은 근거들에 의해서 정당화되고 있을 뿐이다.[51] 그렇다! 모든 철학은 항상 자신의 모습에 따라 세계를 창조하려는 충동 그 자체이며, 각 철학을 창시한 자들의 일종의 자기 고백이자 의도하지도 않았고 자신도 모르게 쓴 일종의 회고록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어떤 도덕적 가치를 추구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으로서, 그의 내밀한 본능들이 어떠한 위계질서를 갖는지 확인할 수 있다.[52]



플라톤, 그리스도교, 스토아 철학자, 칸트, 셸링, 헤겔 등도 자신의 충동과 믿음에 따라, 자연을 단편적으로 이해해왔다. 생각의 주체인 자아가 존재한다는 데카르트도, 자신의 확신을 일종의 직관적 인식에 호소하면서 ㅡ 생각하는 어떤 것이 나라는 것, 생각하는 어떤 것이 필연적으로 존재해야만 한다는 것, 생각이란 그것의 원인으로 간주되는 어떤 존재의 활동이며 작용이라는 것, 하나의 '나'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라는 ㅡ 논증하기 불가능한 일련의 대담한 주장들을 펼쳤던 것이었다. 이와는 반대로, 물리학은 보고 만질 수 있는 감각적 근거에 기초하므로 적어도 그것은 최소한의 확실성을 담보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물리학만으로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전부 다 보여줄 수 없으므로, 그것 또한 자연에 대한 하나의 해석에 불과하다.[53] 심지어 앞선 철학들보다도 삶을 더 힘차고 즐겁게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의미와 방향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에서,[54] 그것은 (삶의 가치가 아니라) 도구나 다름없다.[55]



이렇게 철학자마다 추구하는 가치가 달랐으므로, 인간의 기본충동들 모두는 이미 한 번은 각자의 철학을 수행해왔다고 볼 수 있다.[56] 그리고 이런 충동들은 세계를 각자의 방식으로 왜곡해왔기 때문에 잘못된 판단이고 오류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왜곡이라고 하더라도 포기할 수 없다. 우리는 상상도 못할 자유, 무분별, 경솔함, 왕성함, 삶의 명랑함을 즐기기 위해서, 즉 삶을 즐기기 위해서 이렇게 단순화되고 철저하게 인위적이고 적당히 꾸며지고 적당히 왜곡된 세계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57] 심지어 사상 자체에서나 통치, 웅변과 설득, 예술, 윤리 등의 어느 분야에서든지 이 지상에서 자유롭고 정교하며 대담하고 춤처럼 경쾌하며 대가다운 확신을 갖는 것으로서 존재하거나 존재해온 모든 것도 그런 왜곡된 판단 덕분에 비로소 발전해온 것이었다.[58] 즉, 그것은 삶의 조건이므로, 그것이 잘못된 판단이라고 애써 그것을 우리의 삶 밖으로 밀어내서는 안 된다.[59]



하지만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모든 충동은 지배욕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각각의 기본충동들은 하나하나가 바로 자신을 기꺼이 존재의 궁극목표이자 나머지 모든 충동 위에 군림하는 정당한 주인으로 내세우고 싶어 한다.[60] 그것은 "나 자신 이외의 아무것도 진리가 아니다"라고 외치면서, 수많은 다른 가치들을 없애려고 한다. 그러나 어떤 한 사람에게 정당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도 반드시 정당할 것이라고 할 수 없듯이, 모든 사람에게 하나의 가치를 요구하는 것은 각자의 가치추구를 방해함으로써 각자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 것임을 알아야 한다.[61]



가치를 포기하는 것도 하나의 해석만 강요하는 것도 부당하다면, 우리는 다양한 관점들과 정념들이 개입하는 해석들을 최대한 허용하는 가설을 구상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하나의 사태에 대해서 더 많은 정념으로 하여금 말하게 할수록, 우리가 동일한 사태에 대해서 더 많은 눈과 다양한 눈을 동원하면 할수록, 이러한 사태에 대한 우리의 '개념'은 보다 유연해지고 보다 넓어질 것이다.[62] 그렇다고 회의주의나 상대주의처럼 다양한 관점을 그저 수집하는 것에서 그치면 안 된다. 다양한 가치 앞에서 단순히 중립을 지키려고 한다는 것, 그것은 자신의 가치를 추구하지 않게 됨으로써 허무주의로 귀결된다.[63] 우리는 결국 저 다양한 관점들을 자기만의 방식대로 연결하고 관점들의 위계를 재설정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야만 한다! 우리는 새로운 어떤 것으로 존재해야 하고, 새로운 어떤 것을 의미해야 하며, 새로운 가치를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 [64] 그래서 진정한 철학자는 명령하는 자며 입법자다. 그들은 '이렇게 되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우선 인간이 어디로 가야 하고 어떠한 목적을 가져야 할지를 규정하는 작업을 하면서, 과거를 정리해온 모든 사람들의 준비 작업을 자신의 뜻대로 사용한다. 그들은 창조적인 손으로 미래를 붙잡는다. 그들의 '인식'은 창조이며, 그들의 창조는 하나의 입법이고, 그들의 진리에의 의지는 힘에의 의지다.[65]


이제 '자연 그대로의 인간'(homo natura)의 정념들과 그 정념들의 적나라한 위계를 모두 솔직하게 드러내는 해석을 하는 것이 니체의 목표가 된다.[66] 사유가 욕망과 열정의 충동들 상호 간의 연관에 불과하다면, 시험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 가능하다. "이 '주어져 있는 것(충동)'만으로도 이른바 기계적(또는 '물리적인') 세계까지도 이해하기에 충분하지 않는가?" 즉 그것은 유기체적인 과정 속에서 분화되고 전개되어나가기 이전에 모든 것이 강력한 통일체 속에 통합되어 있는 보다 원초적인 형태의 정념 세계, 일종의 충동적 생을 의미한다. 기계적 세계를 이러한 생명의 초기형태로서 이해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우리의 충동적인 생 전체를 의지의 유일한 근본형태, 즉 힘에의 의지의 분화와 전개로서 설명할 수 있다면, 또한 모든 유기적 기능을 이러한 힘에의 의지로 환원할 수 있다면, 작용하는 모든 힘을 '힘에의 의지'로서 분명하게 규정하는 것은 정당성을 얻게 될 것이다. 내부로부터 관찰된 세계, 그것이 갖는 '예지적 성격'에 의해서 규정되고 정의된 세계는 '힘에의 의지', 이외의 것이 아니다.[67]



자연을 있는 그대로 생각해보라. 그것은 한없이 낭비적이고 아무런 관심도 의도도 없으며, 정의감도 배려도 자비도 없고, 풍요로운가 하면 황량하고 동시에 불확실하다.[68] 그러한 자연 속의 놓여진 생명 자체는 본질적으로 자신보다 약한 타자를 자기 것으로 하고 그것에게 위해를 가하고 그것을 억압하는 것이다. 그것은 냉혹하며, 자신의 형식을 타자에게 강제하고 타자를 자신에게 동화시키는 것이고, 가장 부드럽게 말한다고 해도 최소한 착취하는 것이다. 그것은 유기체의 근본적인 기능으로서 살아 있는 것의 본질에 속하며, 생명의 의지 자체인 본래의 힘에의 의지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주장에 불편해질런지도 모르지만, 이는 모든 역사의 근본적인 사실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인정할 정도로 우리 자신에게 솔직해져야 한다! [69]



한 인간의 정신에 있어서도 그런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정신'이라고 불리는 저 명령적 존재는 자신과 자신의 주위에 대해서 주인이 되고 싶어 하고 자신을 주인으로서 느끼고 싶어 한다. 그것은 살아 있고 성장하며 번식하는 모든 생명체가 지니는 동일한 욕구와 능력을 가지며, 낯선 것을 결합하고 구속하고 지배하려고 하고 실제로 지배하는 의지를 갖는다. 정신은 낯선 것이나 '외부세계'에 속하는 모든 것의 특정한 윤곽이나 특징을 자의적으로 강조하고 자신에 맞게 왜곡한다. 이 경우 정신이 의도하는 것은 새로운 '경험'을 자기 것으로 체화하고 새로운 사물들을 기존의 계열 속에 편입시키는 데, 즉 성장하는 데 있으며, 보다 분명하게 말하자면, 성장한다는 느낌, 힘이 증대되었다는 느낌을 갖는 데 있다.[70]


이러한 의지란 많은 감정과 사유들의 복합체이며, 단어로서만 단일체로 표현될 뿐이다. 또한 '힘에의 의지'는 기존의 해석을 넘어서려는 자신만의 새로운 해석이며, 무엇보다도 그것은 명령의 정념이다. '의지의 자유'라고 불리는 것도 본질적으로는, 사람들이 자신의 명령에 순종해야만 하는 것에 대해서 갖는 우월감이다. 즉 "나는 자유롭다. '그'는 복종해야 한다"는 의식이 모든 의지 속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모든 의지 속에는 저 주의집중, 오로지 하나의 목표에만 똑바로 고정된 시선, '지금 이것 이외의 다른 것은 전적으로 불필요하다'는 저 무조건적인 가치평가, 복종시킬 수 있다는 내적인 확신, 명령하는 자의 상태에 속하는 그 모든 것이 도사리고 있다. 그러한 인간, 의욕하는 인간은 복종하거나 복종하리라고 믿는 자기 내부의 어떤 것에 대해서 명령을 내린다. 동시에 그는 그 명령을 수행하는 자이므로, 인간은 '명령하는 자'면서 동시에 '복종하는 자'다. 그러면서 그는 내면의 또 다른 의지와 함께 이 명령에 저항하는 기쁨을 맛보기도 한다. 한 인간은 수많은 의지들이 저마다의 힘을 과시하는 장이자 그들의 위계를 두고 싸우는 전쟁터인 것이다.[71] [72]



그것은 사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옛날부터 모험심, 대담함, 복수심, 교활함, 약탈욕, 지배욕과 같이 강력하고 위험한 충동들은 외부의 적에 대항하기 위해서 이제까지 집단에 유용하다는 의미에서 존중되었을 뿐 아니라 크게 육성되고 단련돼야만 했다. 하지만 사회가 안정된 지금에 와서는 그러한 충동들이 이웃들에게 위험하다고 여겨졌고 점차 부도덕한 것으로 낙인이 찍히고 비난을 받게 되었다.[73] 그래서 의지가 병들고 퇴화한다. 오늘날 보다 높은 인간, 보다 높은 영혼, 보다 높은 의무, 보다 높은 책임, 창조력과 지배력으로 넘치는 대부분의 것들은 배척된다. 그들은 독립적으로 결단을 내릴 줄 모르며 의지에 깃들인 용감한 쾌감을 전혀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런 의지박약자와 다르게 존재할 수 있다는 것, 홀로 서고 고독을 즐기며 자신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고귀한 인간의 조건이 된다.[74]

https://youtu.be/wHWbZmg2hzU


고귀한 인간은 자신 속 강력하고 서로 화해하기 어려운 충동들을 능숙하고 교묘하게 조정하여, 그러한 본성 안의 대립과 싸움을, 삶을 자극하고 북돋는 것으로 만든다. 그리하여 기묘한 마력을 지닌 저 불가해하고 불가사의한 인간, 승리를 거두고 사람을 유혹하도록 미리 운명지어진 수수께끼 같은 인간이 출현하게 된다.[75] 또한 고귀한 인간은 자신을 가치를 규정하는 자라고 느끼기 때문에 타인에게 인정받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에게 속하는 것을 존중하며, 충만한 느낌, 넘쳐흐르려고 하는 힘의 느낌, 고도의 긴장에서 오는 행복감, 베풀어주고 싶어 하는 풍요로움의 느낌을 가진다. 그도 불행한 자를 돕지만, 동정에서가 아니라 넘쳐나는 힘에서 비롯된 충동에서 돕는다. 고귀한 인간은 자신 안에 존재하는 강력한 자를 존중하는바, 이 강력한 자란 자신을 제어할 힘을 가지고 있으며, 말하고 침묵하는 법을 알고 있고, 자기 자신을 엄격하고 혹독하게 다루는 데서 기쁨을 느끼며, 엄격하고 혹독한 모든 것을 존경하는 자다. 그렇기에 고귀한 인간들은 겁 많은 인간, 불안해하는 인간, 소심한 인간,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하는 인간, 편협하고 의심 많은 인간, 비굴한 인간, 학대를 감수하는 개 같은 인간, 거지 같은 아첨꾼, 그리고 무엇보다도 거짓말쟁이를 경멸한다.[76]



소심하고 비굴한 인간들은 가능하다면 고통을 없애려고 한다. 하지만 고귀한 인간은 오히려 일찍이 없었던 정도로 고통을 증대시키고 더 악화시키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안락과 같은 것은 그의 목표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을 우습고 경멸받아야 할 것으로 만드는 상태이다! 고통을 견디는 훈련, 거대한 고통을 견디는 훈련, 이러한 훈련만이 지금까지 인류의 모든 고양을 가능하게 했다. 영혼의 힘을 강화시켜주는 불행 속에서 영혼이 느끼는 긴장, 위대한 파멸을 눈앞에 볼 때 영혼이 느끼는 전율, 불행을 짊어지고 견뎌내고 해석하고 이용하는 영혼의 독창성과 용기, 그리고 또한 일찍이 비밀, 가면, 정신, 간지(奸智), 위대함에 의해 영혼에게 선사된 것, 이것들은 고통을 겪으면서 그리고 거대한 고통의 훈련을 겪으면서 영혼에게 선사된 것이 아닌가? 
[77]


니체에 따르면 '행복'이란 자신의 삶이 가리키는 하나의 목표, 즉 자기 내부의 의지가 자신의 삶 전체를 통해 내리는 명령이 있으며, 바로 그 명령 ㅡ 그 자신의 강한 의지가 원하는 과제ㆍ사명을 찾음으로서 흘러 넘치도록 풍요로운 기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94] 그 의지는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가 원하는 과제를 수행함으로서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고자 한다.[95] 심지어 과거에서부터 미래에 이르기까지 자기 자신으로 살아왔고 살아갈 모든 부분에서 자신의 의지가 원하는 것이라는 필연성을 느끼고자 하며, 그리하여 일체의 '그러했다'를 '나는 그러길 원했다!'로 변형시키고자 한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결의를 다지는 모든 것[96]이 니체에게 있어서 '운명'을 가르킨다.[97] [98] [99]



인간은 어떻게 자기 자신이 되는가? 인간은 어떻게 자신의 과제와 사명을 발견하는가? 그것은 어느 한 순간의 자신의 의도나, 종교, 도덕이 지시하는 목적의 결과가 아니다.[100] 우리의 '삶 자체'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가치를 설정하라고 강요하는 것이다.[101] 단지 우리가 모든 위대한 말과 모든 위대한 태도에 현혹되지만 않는다면,[102] 조직하고 지배하도록 예정되어 있는 '본능(이념[103])'이 우리의 의식 깊은 곳에서 점점 자라나서 명령하기 시작하며, 우리가 옆길과 잘못된 길에서 되돌아오도록 서서히 인도한다. 그 본능은 어떤 지배적인 과제, 즉 '목표', '목적', '의미'에 대해 무엇인가를 알려주기도 전에, 미리 그것에 봉사하는 모든 능력들이 차례로 형성되도록 준비한다. 그래서 모든 능력이 성숙되고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그 순간에, 그 자신의 삶 자체에서 비롯되는 사명이 갑작스레 그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는 '구체적인 무언가'를 이루려고 애써본 적이 없는데도 말이다.[104] [105]



이러한 사명은 그 자신이 살아온 삶의 궤적과 취향에 따라 그에게만 맞는 과제와 그에게만 맞는 방식으로 주어지며, 그것은 그 자신의 삶을 더 강하고 더 대담하고 더 쾌활하게 만들어준다.[106]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얻기 위해 급해질 필요는 없다. 본능이 너무 일찍 자신을 자각하여 자신의 미성숙한 능력에 비해 감당하지 못할 과제와 사명을 갖게 되는 것은 극히 위험한 일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심지어 인생의 실책들, 즉 때때로 옆길로 샌다든지, 길을 잘못 든다든지, 주저한다든지, 소극적으로 군다든지, 자신의 과제가 아닌 과제들에 진지한 관심을 낭비한다든지 등과 같은 실책들조차도 나름의 의미와 가치를 가진다. 오히려 이러한 실패의 경험들은 자신의 능력이 성숙해질 때까지 자신을 진정으로 시험할 고통을 탐색하는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107]



인간은 일생동안 병든 상태와 건강한 상태를 넘나든다. 이 모든 것에서 명령을 내리는 것은 자기보존 본능이며, 병들어 있다는 것은 자기보존 본능, 즉 방어 본능과 공격 본능이 쇠퇴해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108] 정신이 병들고 약해졌을 때 그는 무기력에 빠져 허무 속에서 살아가면서, 자기 자신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며 알 필요도 못 느낀다. 이로 인해 그는 약해진 상태에서 더 약해진다. 반면에 정신이 건강하고 강해졌을 때 인간은 충만함으로 가득찬 채 넘치는 의욕으로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고자 하며 이를 통해 자기 자신이 진정 무엇이 되기를 원하는지를 확인하고자 한다. 그러한 자는 사명을 수행함으로써 더욱 강해지고 굳건해진다.[109] 그러므로 인간은, 아니 인간의 삶은 무엇보다도 우선 병에서 회복하여 건강해져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러한 병에서 회복하여 건강을 되찾을 수 있는가? 니체의 처방에 따르면, 회복하려는 자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부정적인 목적에 힘을 낭비해선 안 된다. 그는 강행군 끝에 눈 속에 쓰러지고 마는 러시아 군인이 보여주는 무저항의 숙명론처럼 '다른 것'에 가능한 한 드물게 반응해야 한다.[110] 자기 자신을 하나의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것, '다른' 자신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 그것은 그러한 경우에 위대함 그 자체며, 이로서 건강하고 강한 의지를 회복할 수 있다.[111]



건강하고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은 그 어떤 고통 속에서도 자신이 극복할 과제와 사명을 발견할 수 있고 발견할 것이다. 사실, 사명은 저항과 고통 속에서만 더욱 뚜렷해지고 점차 확신으로 다가온다. 따라서 그러한 자, 의욕에 넘치는 자는 일부러 저항과 고통을 찾아 모험을 나선다. 그러한 자가 얼마나 성장할 것인가는 그가 보다 강력한 적수 또는 보다 강력한 문제를 찾아 나서는가 아닌가에서 드러난다. 상대가 나보다 약할 경우 굳이 결투할 필요가 없다. 그의 과제는 단순히 일반적인 저항을 제압하는 데 있지 않고, 자신의 모든 힘과 유연함 그리고 싸움 기술을 쏟아부을 만한 저항을, 즉 자신과 대등한 적수를 제압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112] 그는 자신만큼 강한 적에게만 희열을 느낀다. 그에게 고통은 기쁨이 된다. 그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113]



아모르 파티(Amor Fati) ㅡ 운명을 사랑하라. 그것은 이러한 자신의 과제와 사명, 이에 대한 스스로의 대답과 그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과 앞으로 올 모든 것을 필연으로 여기고 사랑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만큼은 의욕이며, 삶이며, 놀이이며, 구경거리이기 때문이다. 이 의욕에서 나오는 기쁨은 너무나 강력해서 심지어 그의 본능은 자신의 내부로부터 솟아나오는 힘들의 압도적인 압력으로 인해 그 자신을 신중하게 보호하는 것마저 잊어버린다. 그는 그 자신의 과제를 위해 자신을 탕진하고 자신을 아끼지 않다가 기어코 자기 자신을 파멸로 이끌어낸다. 그는 필연적으로, 숙명적으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으며, 강물이 강둑을 넘어서 흐르듯이 아무런 생각 없이 그렇게 한다.[114] 이는 상승함으로서 하강하는 것이다. 기쁨을 누리고자 고통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다.[115] 그것은 일종의 디오니소스적 도취이자 삶과 창조에의 몰입이다.[116]



인간의 위대함은 그가 목적이 아니라 다리라는 데에 있다. 인간에게서 사랑받을 만한 점은 그가 건너가는 존재이자 내려가는 존재라는 데에 있다. 사랑하노라! 하강하는 자로서가 아니라면 달리 살 줄 모르는 사람들을.[117] 그러한 유형의 인간은 '있는 그대로'의 모든 필연적인 것들을 사랑하고자 하며 현실의 무시무시하고 의심스러운 모든 것을 자신 안에도 가지고 있다.[118] 그것은 가장 낯설고 가혹한 삶의 문제들과 직면해 있으면서도 삶을 긍정하는 것, 자신의 무궁무진성에 기쁨을 느끼면서 삶의 최고의 전형을 희생하는 것도 불사하는 생에의 의지,[119] ㅡ 그는 이런 고통스런 운명에 스스로 기쁨의 축복을 내린다. 그는 스스로의 몰락마저도 사랑할 줄 안다.[120] [121] 사랑, 그것은 약간의 광기와 약간의 이성이 아닌가? 사랑, 그것은 무거운 진지함이 아닌 가벼운 명랑함이 아닌가? 사랑, 그것은 즐겁게 노래부르고 웃으며 춤출 줄 아는 것이 아닌가?[122] 사랑에 빠진 자들에게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고, 모든 것이 영원하며, 모든 것이 실로 묶여 있다. 그러하니 비애에 대고 말하라. "사라져라!" 하지만 덧붙여라. "때가 되면 돌아오라!" 이곳에선 고통 또한 기쁨이고, 저주 또한 축복이며, 밤 또한 태양이니. 오, 우리들은 이런 세계를 사랑한 것이다.[123]

                    

Source from ; 나무위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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