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대만에는 왜 왔던 거야?
인도네시아 화교 '엘리', 23년 만에 인사동에서 만나다!
"윤희, 나 4월 13일에 한국 여행 가, 우리 만나자."
얼마 전 인도네시아 친구 엘리로부터 연락이 왔다. 자매 2명과 함께 9일 일정으로 서울과 제주도를 여행한다고 한다. 숙소를 물어보니 인사동 근처여서 인사동에 있는 한 고깃집을 예약했다.
먼저 도착하여 예약한 자리에 앉아 문밖을 보고 있자니 엘리가 온다. 의자에 앉아서 저기 오고 있는 엘리를 기다리고만 있을 수가 없어서 문밖으로 뛰어나갔다.
"엘리, 오랜만이야. 너무너무 반갑다!"
나이도 잊고 껴안고 팔짝팔짝 뛰었다. 20대에 만났는데 23년이 지나 쉰 살 거의 다 되어 다시 만난 것이다.
"윤희, 너 옛날하고 똑같아. 하나도 안 변했어!"
"무슨 소리야, 나이가 곧 50이다. 너야말로 그대로다, 그대로야!"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초등학교 동창 모임에서 서로 어릴 때 그대로라고 한다더니 우리가 딱 그 모습이다.
엘리는 인도네시아 화교다. 2000년에 대만에서 어학연수를 할 때 만났다. 활발하고, 리더십 있고, 사교적이어서 어학당에서 가장 발이 넓었다. 동해대학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같이 어학당 대표로 합창을 하기도 했고, 당시 유일하게 에어컨이 있었던 태국 친구 집에 모여 밥해 먹고 놀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 모든 활동을 엘리가 주도했던 것 같다.
엘리 외에 '광쪼우'라는 인도네시아 친구와도 매우 친했다. 광쪼우는 요리, 그림에 매우 능하며 식물 키우는데 관심이 많은 예술가 기질이 풍부한 친구였다. 광쪼우와 엘리가 가끔 인도네시아에서 화교로 산다는 것이 힘들다는 말을 하곤 했다.
"학교 다닐 때 자전거 바퀴가 일주일에 몇 번씩 터졌지." 화교에 대해 일상적인 괴롭힘이 가해졌던 것이다.
한국, 일본, 말레이시아에서도 화교들을 탄압했었다. 말레이시아는 화교가 많은 싱가포르와 아예 분리했고, 한국은 화교들의 경제 장악을 우려해 부동산 구입을 제한하는 등 경제적으로 통제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의 화교 탄압은 차원이 달랐다. 1945년 독립 이후부터 인도네시아 정부는 중국어 책 반입 금지, 공공장소에서 중국어 사용 금지 등 강력한 동화정책을 시행했다. 그래서 이름도 중국식 이름이 아닌 '엘리'와 같은 영어 이름이거나 인도네시아식 이름이어야 했다. '광쪼우'도 사실 대만에서만 광쪼우라고 불렀지 진짜 이름은 '구나완(Gunawan)'이다.
빈부 경차, 경제권 장악 등의 화교에 대한 불만은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를 계기로 폭발하고야 말았다. 1998년 수하르토 정부의 부정부패에 반발하는 시위로 시작했던 폭동의 화살이 화교에게 겨눠진 것이다. 화교 상점 약탈, 화교 살해가 이뤄졌다. 수하르토 정부가 화교에 대만 불만을 교묘하게 이용해 분노의 방향을 화교에게 돌렸다고 하니 미국 LA 폭동이 연상된다.
이 폭동을 피해 엘리와 광쪼우 모두 1999년에 대만에 왔다. 그래서 동해대학 어학당에 그렇게 많은 인도네시아 학생들이 있었던 것이다. 엘리의 여동생도 당시 홍콩으로 도피했고 지금까지 홍콩에 거주한다고 한다. 올해 2월 딸아이와 대만에 여행 가서 여전히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선생님 두 분과 만났었다. 코로나 이후에 어학당 운영이 어렵지 않냐는 나의 질문에 올해는 오히려 코로나 이전보다 학생이 더 많다는 뜻밖의 대답을 하셨다. 중국이 아직 완전히 개방 전이어서 인도네시아 화교 학생들이 대만으로 몰렸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인도네시아의 화교 탄압이 예전처럼 심각하지 않지만 그 분위기가 어디 하루아침에 바뀌겠는가.
식사를 하면서 엘리와 옛 기억을 더듬어 보니 나는 2021년에 돌아왔고 엘리는 2022년에, 광쪼우는 그보다 더 대만에서 머문 후 인도네시아로 돌아갔다. 엘리는 지금 화교가 운영하는 운송회사에서 근무하고 있고, 광쪼우는 중국 국제 학교에서 선생님을 하고 있다. 어려운 시기를 이겨내고 잘 자리 잡은 친구들이 대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