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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환 May 29. 2021

주말

이승우 작가의 <에리직톤의 초상> 을 읽고

  나른한 햇살이 창문을 통과해 저의 감긴 눈을 비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 저에게 주말은 단지 평일을 미뤄내고 그것에서 달아날 만큼 달콤하지도, 매혹적이지도 못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유난히 의도한 바쁨을 즐기던 요즘, 주말만 되면 뜬금없는 감정의 유세에 저는 휴대폰을 엎은  애꿎은 천장만  적지 않은 시간을 응시합니다.

그러다 결국 과제를 빌미로  에리직톤의 초상에 초점을 둡니다.

흥미진진하지만 형석의 추락사와, 혜령의 도피와 , 태혁의 붕대, 그것을 떠나 에리직톤의 도끼질을 이해할 의지도, 행동력이나 신념조차 저에게서는 눈곱만큼도 찾을  없는 것은 애석하게 내려쬐는 태양빛 만이 까닭이 아닌 것이며 , 가독성이 떨어지는  문장이 사실 혼잡한 마음이나 내면의 흐름 따위를 일시적인 쾌락과 낭만이란 이름으로 덮어 인생을 꾸미려고 하는 승자의 교묘한 묘수와, 그것이 만들어낸 상징계의 안락을 취하기 위해서라는 것은 단순히 제가 남아나지 않은 까닭일  있습니다.

결국 사람이라는 것은 먹고 마시지 않으면   없는 존재라는 것은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알면서도 애석히 끼니를 챙기고 도중 갈증을 해결하려는 발걸음마저 마다하지 않는 것을 보니, 죽음이라는 작자에게 평가받기엔 나의 작문이 확실한 울림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엔 충분했습니다.

그조차도 나에게 다행이라고 생각할 주변 몇몇 인물들을 생각하니  나름대로 슬퍼졌습니다. 철저히 비밀로 지켜지던 나의 지극한 망상이  이렇게 나의 어리석음으로 비롯된 협박에 철저히 발가벗겨질 생각을 하니 치욕스럽기도, 한편으론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어쩌면 테러리스트들이 당겨지는 방아쇠에서 그들의 삶을 구원하듯, 저는 지금  난잡한 생각을 글로 정리하는 것으로, 구출을 애원하는 나의 삶에 약간 짧고 닳은 밧줄을 건넨 것이라며 쓰린 속을 달래 봅니다,

허나 여전히 닿지 않는 것은 저명한 사실입니다. 사실  누구도 자신의 삶을 구원한 사람은 없으며, 허상에 빠져 자신의 삶이 구원받았다고, 혹은 받는 중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이뤄놓은 사회에서 저는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철저한 이기주의의 사람들이 자신의 안정을 위해 신을 믿고, 폭력으로부터 멀어지고자 하지만 그들이 유지하는 체제가 분명히 우리에게 가해지는 폭력에 가담하고 있는 것조차 저명한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여전히 아침의 햇살이 저를 몹시 짜증  정도로 눈부시게 파고들 것은 우주의 섭리에 따른 예측이자 미래이며, 제가 알아낸 사실로 저는, 절대 어떠한 폭력에도 가담하기 싫으며, 그렇다고  폭력에 당해 굴복할 자존감도, 그것에 대항할 용기도 저에게선 찾아볼  없는 노릇입니다.

제가 짓밟고, 아니, 우리가 짓밟고  있는  시간은 살아있는 주말입니다. 단순히 달력에 표기되어있음을 떠나 모두가 주말이라 믿기에 주말입니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주말이 우리의 것이라 믿습니다. 단순히 말해 사람들이 믿지 않으면 주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상상해보세요 주말 없는 세상을.

아마  년도  되지 않아 모든 인간들은 자신의 악한 본성을 끊임없이 드러내며  세상은 살아있는 지옥보다 더욱 악한 것이 되어 현저히 역겹고, 뜨겁고, 악할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더욱더 그것은 살아있을 가치를 얻고, 믿음 받을 가치를 얻고, 매혹적인 빨간색으로 흐리멍덩한 달력에 새겨져 추앙받고 모두를 기쁘게 합니다. 그것은 살아갈 이유를 얻었고 존재할 이유를 얻었습니다.

가치란 이유입니다. 앞의 문장에서도 눈치챌  있듯 가치란 이유이며 이유란 가치입니다.  가치가 상대적이라는 것을 배운 우리는, 이런 글을 적잖이  내려갈 만큼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낼 저의 삶을 누군가는 가치 있다고 평가할  있고, 누군가는 가치 없는 글에 퍼붓는 어이없고 허용되지 않은 시간이나 보내는 가치 없는 삶이라고 평가할  있다는 것을  것입니다. 마치  시간이 자신에게서 빌려간 것이라는 듯의 모욕적이고 경멸스러운 어투는 제가 던진 밧줄의 길이를 조금  길게 뻗어나가게   있을 듯합니다.

구원은 폭력적입니다. 상이한 가치와 이유가 그것의 증거이며, 살아있는 주말에  있는 신도들의 세상에  있는 우리가 그것의 증거이며, 제가 여전히 주말 아침 햇빛을 끔찍이 싫어하게  까닭 역시 그것의 증거입니다.

대단한 것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단순히 당신도 겪었을 예의를 빙자한 지극히 사회적인 규칙, 주말의 은근한 평온함과 느긋함이 주는 노동의 효율 따위의 것에, 착취와 억압과 자유 사이 대항할 펜과 종이가 있을 당신에게,  소설을 빙자한 편지를 마지막으로 하여금, 생각에 잠겨 주말의 죽음을 다시 한번 떠올리며 저는 적어도 살아간다는 느낌은 받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저의 편지이자 작품이며, 용기이자 자존감이며, 굴복이자 도전이며, 제가 가졌던 죽은 정신이 남긴 영혼이자, 유서이며, 그것에 대한 애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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