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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환 Jun 01. 2021

첫 문장의 묵직함

‘명작’이라 불리는 것들에 관하여

 나는 문장의 힘을 믿는다.  힘이란 우주와 닮았지만 하늘은 아니며, 구름같이 흐르지만 파도와 같다. 삶과 척진 자의 문장은 울림이 있다. 우리는 그런 이들의 모아 명작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일지도 모른다. 양로원에서 전보를 한 통 받았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 근조.’ 그것만으로는 아무런 뜻이 없다.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어지럽혀진 글을 보면, 나의 마음은 또 다른 태양을 찾게 된다. 난 그들이 사는 세상과 나의 것은 전혀 다르게 구성되어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명일 장례.’ 유일한 여백은 그뿐이다. 사실 장례만큼 확실한 것을 삶에서 찾아보긴 힘들다. 그래서 저 단락을 문장으로 읽은 것은 나만의 착각인가 우리의 공감인가 고민하여야 할 것이다. 가장 원초적으로 고심한다. 슬픔, 행복이 그렇다는 것은 어디에 빚대야 하는가. 그냥 정의 내리는 것이다. 어제와 오늘에 대하여, 전보 속 형식과 너머의 관계에 관하여. 그래서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조각난 채 다가오는 퍼즐이 문제로 읽히는 것처럼.

 

 참 부끄러운 생애를 보내왔습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서 있다.


 젠치 큰스님의 코라고 하면 이케노오 마을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고양이, 이름은 전혀 없다.


 울음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가? 나는 답을 내릴 순 없지만 저 문장들은 나의 눈시울을 땅 깊숙이 매몰리게 했다. 삶의 무게란 그렇다. 명문가들의 삶이 앵무새의 울음처럼 그들의 문장에 실렸고, 난 그들의 힘을 감당, 아니 감내할 수 없다.


 내가 사랑한 문장, 그를 사랑한 이의 문장, 매몰찬 문장, 그의 문장.


 글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것은 우리의 배를 채우지도, 갈증을 잠재우지도 못한다. 그나마 글이 얽힌 종이로 불을 지필 수 있지만, 요즘은 종이책도 사치로 취급되지 않는가?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작품도 불태워질 현실 아닌가? 예술은 삶으로 만들어지지만 삶으로 이해해서 안 된다는 것이 획일화되어 우리에게 단순한 요깃거리가 된 것이 오래다.


 그래서 나는 명작을 믿지 않는다. 얼마나 어지러운 삶인가. 국가도 벗어나지 못할, 도대체 얼마나 비루하고 헤져버릴 삶인가. 그래서 사랑을 믿고, 사람을 믿고, 내일을 기대하며 살아간다. 모순적이다. 삶도, 명작도.


....


 하하. 그래서 글은 우리를 살게 하지 않았는가?


 인생은 땅 위에서 고역이요.

그의 생에는 날품팔이의 나날과 같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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