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혼자 부절주절!@#$%?
주절주절!@#$%?
보는 건 쉽습니다. 관찰은 어렵습니다.
그저 본다고 해서 관찰이 되지 않습니다.
본다는 행위에는 대상이 되는 것의 정보가 흘러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사물을 인식하지 않아도 바라본 대상의 모양과 색을 저절로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물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이라면 기능 또한 바로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본다’의 일차원적 행동은 엄청난 정보를 눈을 통해 담는 것입니다.
그러나 관찰은 다릅니다. 관찰은 대상의 고유성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필요하며, ‘다양한 면’을 고려하지 않으면, 정작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발견은 관찰자의 시선과 관찰하는 대상과 얽히는 과정에서 깊은 교감이 생기곤 합니다. 사물에 대한 개인적 사유가 관찰 결과에 작용합니다. 하지만, 사유가 설득력을 갖출 만큼 객관성을 확보하지 못하면, 관찰의 의미가 볼품없거나 무의미해질 우려도 커집니다. (그저 혼자 놀기 기술력만 상승ㅋㅋㅋ)
예를 들어 지금 노트북을 테이블 위에 놓고, 관찰한다고 하자! 그럼 일차원적으로 그 노트북의 색과 크기가 눈에 들어올 테고, 그 노트북을 만든 회사와 브랜드, 이름을 단번에 떠올리게 됩니다.
“본다”는 행동은 여기서 끝. 그 다음부터 “관찰의 시간”으로 들어가게 되고, 이 노트북 고유의 특성을 고민하고 동시에 머릿속에 물음표를 그립니다. 우선 관찰하게 된 목적을 따라 물음표를 세우고 응답을 기다립니다. 지그시 눈을 감고 물음표를 상상할 수도 있고, 어떻게 변하는지 상상의 나래는 펼치며 한 편의 시나 서사를 떠올려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노트북은 내가 관찰한 목적과 어울리는 옷을 갈아입고 있을 수도 있고, 그냥 노트북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일련의 행동과 기다림의 시작과 끝이 관찰입니다. (헛 숨차! -.-;;)
관찰을 왜 하는 걸까?
물음표는 관찰의 목적입니다. 관찰 왜 하는 걸까? 대상을 통해 무엇을 얻고 싶어서, 나는 ‘본다’ 행위를 유지하고 지속하는 걸까. 미안함 때문일까? 설렘 때문일까? 2021년 애플에서 개발한 ‘M1’ GPU를 탑재한 맥북이 출시되었습니다. 걷잡을 수 없이 그 맥북에게 끌리기 시작했고, 지금 쓰고 있는 노트북과 관계가 서먹해지는 내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내가 관찰한 건 새로운 맥북이었으나, 발견한 건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는 유난스럽기 짝이 없는 허세충이었습니다.
그 허세충의 원초적인 목적은 그 맥북을 갖는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관찰’은 거창하고 거룩한 이유의 합리화 따위로 희생된 욕망의 사적 동기. 이토록 어렵고 추상적인 언어만 골라 사유를 만들어내는 것은 관찰의 어려움을 덜어낸다면 그 맥북은 내 것이 될까? 어지간하게 애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2년이 조금 지났을 뿐, 쌩쌩하고 팔팔한 현역의 노트북을 은퇴 혹은 명예퇴직의 길로 권유하는 구조조정의 타당과 정당과 합당과 온당을 찾는 비겁한 조치에 관찰의 시선 끝이 무디고 흐려지고 있습니다.
나는 정말 관찰하는 법을 모르는구나.
대상을 통해서 자신의 욕망만 발견하고 마는, 어느새 대상은 없고 적막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듯한 곤란이 맨탈을 뒤흔고 있습니다. ‘관찰은 나를 발견하는 것이다.’라고 방점을 찍기에는 어설프고 허접합니다. 관찰을 관찰하고 싶은데, 관찰에 대한 탁월한 의미를 찾는 망상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머니는 늘 처염하다.
새로 나온 맥북을 사고 나면 통장에 남는 건 이번 달 관리비 정도입니다. 그런데도 나는 ‘관찰의 어려움’을 충실하게 수행할 것인가? 아니면 ‘어려움’이란 의미에 또다시 오랜 시간을 들여 상상의 나래를 펼칠 것인가? 고민은 길어지고 주머니 짧아집니다. 그니까……. 노트북이 없는 것도 아닌데, ‘신상’이여! 갖고는 싶고, 주머니 사정은 빠듯하고, 그래서 소비는 처염합니다. 소비를 결정하는 순간부터 주머니에는 처절만이 남겠지요. 아니면 다른 관찰법이 생길까? 어쩌면 좋지?
나는 지금 내 욕망과 주머니를 관찰 중입니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응답이 없습니다. 그건 이미 소용없는 짓이란 걸 알고 있기 때문일까? 이미 답은 정해놓고, 어떤 서사를 기다리는 걸까? 점점 좀이 쑤십니다. 진득하게 있다가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는, 소심하기 짝이 없는 관찰, 관찰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보잘것없는 개인의 사유가 자신도 미덥지 않을 정도로 얄팍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나는 이 지점 가장 자신의 이야기될 수 있을 거라. 마음을 고쳐먹습니다. 불신이 일어나는 순간부터 익숙하고 사소한 것들을 다시 관찰합니다. 말이 되는 것. 말이 안 되는 것. 유치한 것. 부끄러운 것. 상관하지 않고, 덤덤하게 말할 자신감 생기면 그때부터 앞으로 쭉, 관찰하고 슬쩍 회피하고, 반복하다 보면 A4 한 장의 글 정도 쓸 수 있지 않을까. 또 한 번 찌질을 완성! 나는 내 잔고에 위로를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