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라고 주절주절@#$%? Part_2
@#$%? Part_2
요즘 들어 부쩍 싫어진 말이 몇 개 있습니다. 왜 싫어졌을까 생각해보면 그 말(단어)이 들어있는 문장은 결코 나를 인정하고자 하는 뜻이 담겨있는 것 같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늘 양보나 희생을 강요하는 듯한 압박이 느껴지곤 합니다. 오히려 반감이 생깁니다. 그래서일까! 어느 누구에게도 내가 싫어하는 말을 상대방에게도 하지 않으려 노력 중입니다. 다른 일에는 매사에 최선을 다하거나 열정이 없으니, 이런 거라도 노력하지 않으면 스스로 인간답지 않은 것 같은 비약에 사로잡혀 매번 오늘이란 시간과 마주합니다. 좋아하는 것이야 아무래도 좋으니 그다지 리스트를 만들 필요도 이유도 없습니다. 하지만 싫어하는 것은 최대한 마주하고 싶지 않으니 경계하고 조심하고 있습니다. 그러려면 명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지는 말이 무엇인지……. 그리고 몇까지 찾아냅니다.
화해
첫 번째 화해입니다. 화해는 그냥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싸운 사람이나 어떤 체계 같은, 상대방과 갈등이 물러설 수 없는 막다른 길에 몰렸을 때 일어납니다. “막다른 길”이란 ‘정의’ ‘신념’ 같은 규범이나 정신적 면을 일컫기도 하지만 신체적인 위협 또한 포함합니다. 어떤 악의가 내게 향해 있거나, 내 선택과 의사에 관해 일방적으로 탄압하는 존재와 존속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즉, 서로 볼 장 다 본 전여친과 계속 마주하는 일보다 곤욕스러운 일이며, 사사건건 내리갈구는 상사와 퇴근. 후 '술 한잔 하자'는 제안을 하루도 빼먹지 않고 받아야 하는 섬뜩함보다 공포스러운 일입니다. 싸움에 승리나 패배 따위가 명확하지 않은데, 사과라든지 의기투합해보자는 얼렁뚱땅이라든지……. 무슨 일이 일어나도. 스스로 그 상황을 완벽하게 장악하거나 지배할 수 없는, 오히려 이리저리 끌려다녀야 하는 것이 결국 화해라는 명분 속에 감춰져 있는 진실입니다.
대부분의 화해는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권유나,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이라 “옳음”을 주장하는 분위기 속에 떠밀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게 얼마나 폭력적인지 알아야 합니다. ”화해”가 좋은 것. 가치 있는 것이라는 것은 그럴 마음가짐이나, 상대방으로 하여금 신뢰가 준비된 사람에게 국한되어야 합니다. 아직 앙금이 있거나 앙금 자체를 생각하거나 들춰보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계속 화해란 명분을 강요하는 것. 분명 싫습니다.
문제는 내가 시작한 싸움이나 내 잘못으로 비롯된 상황이라도 마찬가지지요. 왜냐면, 나는 겁이 많습니다. 겁이 너무 많아 부조리나 불합리적인 상황이 핍박해 온다 하더라도 정면 승부의 여력 따위를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내가 정한 싸움의 방식은 화해를 안 하는 것! 그것만이 나 같은 겁쟁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병법입니다. 그래서 화해가 싫습니다. 우선 싸워야 하는 게 싫고, 싸움이 일어날 법한 모든 상황이 화해로 이어질까! 두려워서 싫습니다. 무엇보다 내게 더 나은 걸 일러주거나 가르치려 드는 제삼자의 오지랖이 싫습니다.
용서
화해랑 이어지는 말입니다. 이 또한 화해와 다르진 않습니다. 그나마 차이가 있는 건 용서와 화해, 무게의 차이 아닐까요? 화해는 뭐가 되었든, 잘잘못 따위가 명확하지 않거나, 중요하지 않습니다. 화해는 관계 회복이 우선이라면 용서는 새로운 관계로 탈바꿈시켜버립니다. 용서를 하거나 못하는 자와 용서를 구하려는 자의 관계는 대체로 피해자와 피의자 위치에 놓입니다. 내가 싫어하는 말의 당사자는 피해자일 경우입니다. 이것이 화해와 가장 큰 차이 아닐까요.
사실 단순히 실수라는 개념으로 잘못에 대한 책임으로 용서라고 불릴 만큼 무거운 건 아닐 수 있습니다. 약속 시간을 잘 지키지 않거나, 물을 엎질러 내 옷을 젖게 하거나, 스트레칭을 하려고 휘저은 상대방의 팔에 내 얼굴에 강타하거나 하는 일은, 타인의 의도치 않은 실수를 감싸 안을 수 있는 인성의 차이로 그다지 “싫고 좋고”의 나뉨의 개념은 아닐 수 있지요. 그렇다고 빼놓고 말하기엔 용서란 감정적 카타르시는 무게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다만, 약속을 매번 늦거나 혹은 지키지 않거나, 물을 엎지른 게 아닌 의도적으로 내 얼굴에 뿌리는 모욕과 분노나, 꽤락에 휩싸여 휘두른 주먹에 노출된 폭력은 인성과 별개로 반드시 그 책임을 물어야 하는 당위가 생깁니다.
하지만 실수는 그런 당위가 한풀 꺾인 채 존재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용서를 안 하는 사람이 더 나쁜 사람으로 비치곤 합니다. 용서란 시간이 필요합니다. 화해처럼 일단 하고 보는, 감정적 설계도면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누군가 내게 정말 사소한 잘 못을 했더라도 내 감정은 단번에 그 잘못을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때론 그 잘못의 사소함이 내가 아닌 타인에 의해 결정될 때 더욱 그렇습니다. 실수든 의도든 '잘못'에는 사과가 따라야 합니다. 그건 명백합니다. 하지만 사과에 관한 즉각적인 대처로 수용만 하라는 식의 뉘앙스는 몹시 폭력적이지요. "사과 했잖아요." "아까 사과드리지 않았습니까."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당장 면제하라는 윽박! 폭력이 아니면 뭐란 말입니까!
우선 시간이 필요합니다. 내가 충분히 그 용서란 놈은 불러올 시간 말입니다. 그리고 용서를 안 하면 좀 어떤가요? 용서의 결정은 오롯이 피해자의 선택과 집중입니다. 피의자나 제삼자 따위가 이래라저래라 할 일이 분명 아니라는 것입니다. 용서란 말이 싫은 이유는 '반드시 해야 하는 당위'가 지나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