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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음 허투루 Oct 12. 2023

A와 B의 테이블

그냥이라는 욕망 


  앉자마자 A는 유퀴즈 쇼츠를 보고 난 후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어떤 집단에 오래 몸담고 있으면, 어느새 그 안에 나도 모르게 갇히게 된다. 늘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비슷한 시선이나 관점 때문에 또 반복하고, 낯선 사람이나 낯선 시스템이 들어와도 결국 자기 자신이 속한 환경으로 맞추게 한다. 스스로 깨어있다고, 열려있다고 하지만 자신을 낯선 그 무언가에 맞추는 일은 극히 드물다. 그래서 이해라는 그럴듯한 말로 포용하는 것 같지만 사실 존중과 잠시 떨어지는 경우가 종종 생기곤 한다.

  그것이 나쁜 건 아니다. 존중은 고려하고 배려한다는 것이지, 밑으로 들어가거나, 내 의사를 맡기고 의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어느 한 카페에 대다수 음료에 카페인이 들어 있으나, 카페인 섭취가 불가한 고객의 요청 때문에 카페인 음료를 모두 없앨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단지 디카페인 음료를 카페인 섭취가 불가한 고객에게 제공하는 것이 존중이고, 그 존중을 받아들이는 고객의 선택에 존중과 존중에 대한 존중을 발휘되는 것이 당위가 아닌가. 왜?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미덥지 못하나?

  하지만 우리는 너무 쉽게 그런 경우를 접하지 않나. 얼마 전 뉴스에서 보도되고 SNS에서 급속히 확산된 사건. 그걸 사건이라 말해야 하는지 얼척이 없는 이 시대의 헐렁하기 짝이 없는 사건의 무게. 야외 태라스는 흡연이 안된다고 말하고 누구라도 그 정도 지침쯤은 알만한데도, 담배를 피우지 말아 달라는 카페 직원의 요청을 일부러 커피 바닥에 쏟으며 진상을 부리던 고객새끼~의 영상이 떠오른다.

  그들도 근처 자영업자로 비슷한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 그들이 자신의 가게에 저리 담배를 꼬나물고 있으면, 퍽이나 손수 재떨이랍시고 종이컵에 젖은 휴지라도 넣어 주실라나? 인성을 봐서 내 얼굴에 뜨거운 물을 들이붓지 않는 게 다행일지도 모른다.

  안다. 극단적인 비유다.

  자영업이라는 집단과 흡연이라는 시스템과 그걸 수용하고 바라보는 차이 정도로 서론을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인성으로 치부해 버리기엔 비슷한 사례를 우리 엿보고 있지 않나? 엿보려 하지 않아도 눈앞에 떡하니 차려지기까지 하니, 뭐 이를 개인이 도덕성이나 벌금 정도의 핸디캡에 맡기기엔 다른 무수한 잡범도 힘을 잃지 않고 커지는 게 아닌가 싶다.  


  A의 말을 들은 B는 서회평론이나 어떤 논설처럼 쏟아내며 열을 올리는 의아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A 또한 어느 집단에 오래 몸담고 노역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는 생이 아닌가. 기자라는 게 어쩔 수 없이 많은 양의 정보를 깎고 다듬는 일이라 보니, 학습 또한 노역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 어디에도 어울리지 않는 무색무취 같은 B와 대화가 어쩌면 자신의 환경에서 벗어나기 위한 최소한의 방편이었다. B도 어느 정도는 A의 관계가 기껍고 다양한 사람이라고 하면 꼬집을 수 있는 친구였기에 오랫동안 소중하게 이어오고 있다. 하지만 그리 자주 보는 건 아니었기에 한 번 만남면, 진중한 이야기부터 쓸데없는 헛소리나 개드립을 서슴지 않았다.

  A의 말을 듣고 있으니 B는 집단에 속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인간이라 스스로 위안했다. 그런 집단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포기했으나, A처럼 스스로 다양한 사람이라는 군상 중 한 명이고 싶었다. 혼자 있을 땐 그게 가능했다. 특수했으니까. B는 장애인이다. 장애인활동보조도우미가 없으면 삶이 영위될 수 없는, 전동휠체어가 없으면 A조차 만날 수 없는, 인간관계 네트워크가 전혀 활성화가 되어 있지 않은, SNS도 게시물 하나 없이, 그저 엿보기 용일뿐인, 무력하고 외로우나 무력함과 외로움이 만성질환 같아서 헤어 나올 수 없는, 잠시 잊어버리는 것이 가장 완벽한 치유이자 재활이다. 남들 다 누리는 평범을 바라는 친구가 B다.

  A가 B를 처음 봤을 때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군중 속에서 시시덕거리고, 함께 졸업하고 학사모를 던지는 순간에도 B는 다른 애들보다 학사모가 하늘 높지 않았다. 학사모를 던지지 않은 A와 간격이 가장 가까웠다. 그래서일까. B는 유일하게 A와 여태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B는 웃음을 지우지 않고, 어딘가 냉소적으로 A의 의견과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어떤 집단이나 소속에 오래 속해 있지 않다 보면, 다시는 어떤 소속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 들어간다 하더라도 소속감이나 구성원이라고 느끼지 못해 겉돌게 된다. 그토록 바라고 욕망해 오던 욕구지만, 어느 순간 지난 외로움이 그리워진다고 하더라. 그러나 그건 다시 인간관계 네트워크를 실낱 같이 얕고 투명하더라도 만든 경우에 한한다. B는 자신처럼 관계망조차 없는 인간은 비슷한 이야기가 아니라 이야기조차 할 환경 자체가 없다. 어쩌면 몸담은 곳이 없는 상태에 갇히게 된 것인지 모른다. 그런 인간은 SNS나 인터넷 같은 걸 “대화”라고 인식하지 않는다. 만약 인식하게 되면, 자신은 고작 그 정도뿐인 인간이라고 심한 자괴에 빠질 것이다. 우울이나 고독은 그 시점에서 질병으로 변한다.

  B는 A에게 그나마 가뭄에 콩 나는 듯 하지만, 대화라는 걸 하는 기회가 더러 있어 아직 질병을 앓고 있지 않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면서 실제 자신이 정말 나는 조금 더 펼쳐진 인간관계를 원하는가? 물어보면 “원해” 란 답 뒤에 왠지 모를 찝찝함이 남는다고 하며, 물 한 컵을 벌컥벌컥 다 마셨다. 물 한 컵이 그 찝찝함을 다 씻겨주지 못할 것 같아서 A와 B는 다른 음료를 주문했다. 스타벅스는 한적했다.

 B는 A에게 유퀴즈를 좋아하냐고 물었다.

 “뭐 가끔 보지. 거의 숏츠나 짤로 봐. 예전에는 저런 프로그램 PD나 더 작지만, 어쨌든 방송국에서 빌빌거릴 줄 알았는데.”

  “이직해. 근데 거긴 엄청 힘들다던데. 지금보다 더 힘들지 않을까. 그 나이 먹고 가기엔.”

  “안 힘든 데가 어딨냐? 여길 뜨긴 떠야 하는데, 뜰 돈이 없다.”

  “세상을 뜨면 돈 안 들지.”

  “미친놈 너나 떠라.”

  “조만간이다 새끼야. 부조나 해.”

  “뭔 장례까지 치르려고 그냥 가 임마.”

  “남들 하는 건 다 해야지.”

  “내가 상주하면 안 되냐? 그 돈으로 여길 뜰 것 같은데.”

  “사악한 세끼. 네가 먼저 가라 나도 상주라는 거 해보게.”

  “나는 엄마 아빠가 있어서.”

  “나도 있어.”

  낄낄낄.


  A와 B가 소중한 건 이런 시시콜콜함이었다. 세상 모든 진지와 진중. 근엄과 엄숙 따위가 시시콜콜해지는 순간. 세상에 관한 관심과 끊임없는 공부와 탐구 혹은 궁리 따위가 때론 삶의 태로나 자세로 치환되지 않는, 일종의 일탈의 순간 말이다. 다양한 사람을 만나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그런 사람을 어디서 어떻게 만나 대화의 물꼬를 터야 하는지 생각만 해도 엄청 스트레스다. 상대방은 전혀 낯선 존재를 받아 들 것 같지 않다. 그런 사람들의 경계심을 낮추고 빼꼼 고개를 들이민다는 건 얼마나 자존심을 구기는 일일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도를 아시오.'도 아니고)

  다양성의 첫 번 째 관문은 낯섦이 아닐까?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설렘은 위태롭고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자꾸 유발하며 색이 바뀌는 건 아닐까? 어쩌면 다양성은 밝고 차갑고 편하고 거칠고 딱딱함만이 아니라, 일방적이고 고통스럽고 독선적이고 더 나아가 폭력적인 면도 존재할지도 모른다. 다양성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존재의 유무이기 때문이다. 

  A와 B 커피 한 잔이 다 식기 전에 일어나 각자 일상으로 돌아갔다. B는 A가 추천한 유퀴즈 편을 보겠다고, A가 바쁘거나 진짜 이직하거나 못 본 사이 다른 일이 생기므로 다시 볼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자리를 떴다. A는 조간만 시간을 더 내겠다고 그댄 술 한잔하자고 B에게 기약 없는 약속을 하며 차에 시동을 걸고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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