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조건>
취준생이라는 내 위치는 종종 나에게 다음과 같은 불안감을 심어준다. “과연 취업을 할 수 있을까?”, “눈을 낮춰야 하나?”, “이런 상황이 영원히 지속되면 어쩌지?” 같은 것들 말이다. 물론 나는 머지않은 미래에 직장을 구할 것이고 승진, 결혼, 육아 등과 같은 고민으로 머리를 쥐어 싸매고 있을 것이다.(아마도?) 이러리라 나는 확신하지만 그래도 가끔은 불안이 머리에 꽉 들어차는 날이 있다. 이럴 날은 “인생 길어” 와 같은 마음의 여유를 모조리 잃어버리고 삶의 불확실함에 괴로워하곤 한다.
하필 이런 좋지 않은 상황에서 조지 베일런트의 <행복의 조건>을 읽게 되었다. 지금 당장 행복하지 않은지라 심드렁하게 책을 대했다. 두 번째 읽는 것이라 재미가 덜 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첫 번째 봤을 때보다 즐겁게 봤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인상 깊었던 것 중 하나는 시간이다. 이 책은 무려 814명의 70~90년 데이터로 만들어졌다. 얼추 800명의 사람이 70년을 산다고 계산해보면 56,000년이다. 일수로 따지면 20,440,000일이고 시간으로 따진다면 4,905,600,000시간이다. 물론 책에 모든 사람이 등장하진 않는다. 그리고 이 전체 시간을 일일이 체크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놀라운 수치다. 만약 이러한 데이터들이 단순한 숫자 나열에 불과하다면 아무리 많다한들 우리에게 실질적으로 닿는 의미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훌륭한 연구자이자 작가인 조지 베일런트는 이야기를 통해 이러한 숫자의 생동감을 부여한다. 그리고 이야기의 힘은 숫자가 아닌 사람에 집중하게 만든다.
또 하나는 인과관계에 관한 부분이었다. 예를 들면 우리는 보통 우울증에 걸리면 이를 해소하고자 술을 마시고 심해져 알코올 중독에 빠진다고 알고 있지만 실제 전향적 연구를 통해 밝혀진 것은 알코올 중독이 먼저 생기고 그다음에 우울증이 생긴다. 그밖에도 알코올 중독은 과중한 스트레스로 인한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그 자체가 스트레스를 불러일으킨다는 점등이 있다. 이 외에도 통념을 깨는 몇 가지 사실들(조상의 수명과 자손의 수명의 연관성, 부모의 사회적 신분, 어린 시절 겪은 부모의 죽음, 아이큐 등과 70세 이후 삶에 대한 연관성) 도 신선했다.
또한 이 책으로부터 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깊은 위안을 받았다.(저자의 의도와는 전혀 관련 없을 것 같지만) 무라카미 하루키의 자전적 에세이〈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어떤 일을 자신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면 아무래도 세계가 부글부글 끓어서 바짝 졸아듭니다. 온몸이 긴장하고 발걸음이 무거워져 자유롭게 움직이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몇 가지 시점에서 자신이 선 위치를 바라보게 되면, 바꿔 말해 나 자신이라는 존재를 뭔가 다른 체계에 맡길 수 있게 되면, 세계는 좀 더 입체성과 유연성을 갖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책을 읽을 때 주인공들의 다양한 관점을 자신도 모르게 따라가게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직접 그 인물과 사건을 경험하지 않아도 책을 통해 간접 경험할 수 있다. 그리고 현재 내가 인지하고 있지는 않지만 분명히 가지고 있던 내 세계가 확장된다. 나는 <행복의 조건>을 읽으며 이런 경험을 했다.
나랑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국의 주인공들에 감정이 이입되었다. 그들의 노년을 상상했고 거기서 더 나아가 40대의 나, 50대의 나, 60대의 나, 60 이후의 나를 상상했다. 이러한 상상은 나로 하여금 단편적인 삶의 한 부분이 아닌 삶의 총체적인 면을 보게 해 주었다. 하루키식 표현으로 이 책은 내 바짝 졸아든 세상에 부어진 물 한 바가지와 같았다.(싱큐 베이션은 폭포정도) 물론 부어진 물은 증발하겠지만 그래도 책을 읽으며 위로받았던 느낌만큼은 시간이 흘러도 좋은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
사진출처 :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