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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냥이 Nov 18. 2023

결혼은 하고 싶지만 개는 키우고 싶지 않아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데 아내에게 아래와 같은 라인이 왔다.


HJ : 여봉 나 엄마가 새벽에 나간다고 해서 따롱이랑 새벽 1시 넘어서 집 갈라궁

도냥이 : 우리 집?

HJ : 웅웅

도냥이 : 오

HJ : (부탁 이모티콘)

HJ : (부탁 이모티콘)(부탁 이모티콘)

HJ : (부탁 이모티콘)(부탁 이모티콘)(부탁 이모티콘)

도냥이 : 그래유     


이 대화의 전말은 이랬다. 인터넷에 유행하는 세 줄 요약 버전으로 풀어본다.   

  

1. 장인, 장모님이 김장 때문에 집을 반나절 비우게 됐다.

2. 따릉이는 같이 갈 수 없어 집에 혼자 있어야 한다.

3. 이런 모습이 마음에 걸린 아내가 따롱 이를 우리 집으로 데려오려고 한다.     


따롱이는 HJ가 친정에서부터 키우던 개다. 나이는 세 살이고 종은 포메라니안인데 그것 치곤 큰 체격과 긴 주둥이를 가지고 있다. 아마 다른 피가 섞인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말을 장모님이 좋아하지 않으셔서 속으로만 생각하고 있다.


속눈썹도 길어서 언뜻 보면 사람 같다. 그야말로 개 잘생겼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 볼 때 얼빠인 우리 아내가 따롱이를 좋아하게 된 건 어찌 보면 필연에 가깝다.


그녀는 따롱이를 정말이지 좋아한다. HJ가 애기 때부터 직접 키웠기 때문일까. 키운정이 무섭다던데 그 말이 맞나보다. 집에 있는 그녀를 지켜보면 오 분이면 이 사실을 대번 알 수 있을 정도다.


HJ는 뭔가를 하다가도 핸드폰으로 친정집 거실과 연결된 CCTV를 통해 따롱이 모습을 수시로 확인한다. 멍하니 화면을 보는 그녀 모습을 보고 있자면 사랑하는 아이를 두고 타국에 멀리 떨어진 엄마 모습 같다. 이럴 때 나에 대한 사랑은 티끌과도 같게 느껴진다. 아 질투심이 난다.      


그녀는 이렇게 멍하니 한참을 보다가 보고픈 마음을 참지 못할 지경이 되면 직접 차를 끌고 가서 보고 오기도 한다. 가끔 퇴근 후에 지친 몸을 이끌고 친정에 가 기어이 보고 오는 모습을 보면 사랑이라는 게 저런 건가 싶기도 하다.      


그래서 글 처음에 반나절동안 집에 혼자 있어야 하는 따롱이를 보고 데려오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이건 아내 입장이고 난 따롱이가 우리 집에 오는 게 달갑지만은 않다.


따롱이 자체가 싫은 건 아니다. 이쁜 데다 나를 보면 반겨주는 따롱이를 왜 싫어하겠는가. 거기다 걔가 없음 못살아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동물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것도 아니다. 결혼 전 본가에 살았을 때도 고양이들을 키웠었다.     


그러면 뭐가 문제냐고 물으신다면 일단은 수면 문제다. 난 일 특성상 밤을 새우는 야간근무를 하게 된다. 이때 일을 마치고 와서 집에서 서너 시간 정도는 줘야 정상적으로 생활이 가능하다.


그런데 집에 따롱이가 오면 갑작스럽게 달라진 환경과 오랜만에 본 나를 보고 짖을 수도 있고 반갑다며 만져달라고 낑낑댈 수도 있을 것이다. 둘 다 내가 잠에 드는 걸 허락하지 않을 거다.      


옛날 본가에 살면서 고양이를 키울 때도 이런 고통을 겪었었다. 그때도 야간을 마치고 집에 와서 잘라치면 나랑 같이 자고 싶다고 닫아 놓은 방문으로 고양이가 손톱으로 벅벅 긁어댔다. 그 소리에 못 이겨 문을 열어주면 얼마 안 있다가 다시 문을 열고 나가는데 그 소리에 또 잠이 깨기 일쑤였다. 한동안 잠을 자지 못해서 피곤한 채로 생활했던 기억이 선하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 라이프 스타일이 따릉이에 맞춰진다는 문제도 있다. 어찌 보면 이게 나에겐 더 큰 문제로 다가온다. “반나절 정도 맡는 거로 오버하는 거 아니에요?”말한다면 할 말은 없다. 그 말이 맞다.   

   

하지만 상상력이 내 머릿속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 특히나 안 좋은 쪽으로 이런 내 것들은 더욱더 과장되고 강화된다. 인프피라 그런가.


이런 내 상상 속에 와이프랑 도란도란 이야기하면서 소소하게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녀는 피리 부는 아저씨를 뒤쫓는 소년처럼 따롱이 뒤만 졸졸 쫓아다닌다.    

 

퇴근하고 이야기를 나누려 해도 모든 소재가 따롱이다. 따롱이가 무엇을 먹었고 어디서 잤고 언제 일어났는지에 관한 이야기만 한다. 그녀는 더 이상 내가 무얼 하고 어떤 걸 느끼는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리고 따롱이를 보느라 그럴 체력도 없다. 어느샌가 우리 집에 있는 물건들도 대부분 따롱이의 것으로 가득 찬다.     


그녀와 함께 어딘가를 외출하는 것도 힘들어졌다. 원체 가만있지 않고 무서우면 짖는 따롱이를 데리고 식당이나 카페에 가는 건 무리였다. 만약 가려면 애견 동반이 되는 곳을 찾아야 가야 한다. 그리고 이런 고비들을 넘어서 만약 간다고 해도 거기서도 따롱이 케어하느라 바빠서 우리 둘만의 시간을 보낼 시간도 없다.   

   

이거 적다 보니깐 완전 애 키우는 거랑 똑같다. 요즘 애를 낳아야 되는지 스트레스를 받아서 이런 생각이 들었나 싶다. 따롱이를 보니 애를 낳는다는 건 단순히 두 사람이 새로운 다른 사람을 만들어 인류의 존속을 이어간다는 활동 이상이다. 내가 현재 누리고 있고 사랑받는 것을 포기하고 태어난 사람 위주로 모든 생활을 하겠다는 결심과도 같다.


이래서 부탁 이모티콘을 쏴대는 그녀 메시지에 ‘그래유’라고 보냈나 보다. 이건 내 나름의 싫다는 표시다. 번역해 보면 “나는 싫은데 자기가 좋다고 하니깐 알겠어” 정도로 번역 가능하다.      


결국 따롱이는 우리 집에 왔지만 내가 우려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따릉이는 조용했고 난 잘 잤다. 일어나서는 밖에 나가서 머리도 자르고 독서실도 다녀오는 등 외부활동도 다 했다. 그럼에도 마음 한편에는 다음과 같은 의문이 남는다.


내가 과연 부모가 될 준비가 됐을까? 육체적으로나 경제적으론 충분하다. 그러나 내가 받는 사랑과 편의들을 포기할 준비가 되었을까라고 묻는다면 아직 잘 모르겠다. 애가 주는 행복은 막연하지만 내가 잃는 건 눈에 보이듯 확실하다.


부모님을 포함한 내 주변에 애가 있는 사람들은 아이에 대해서 좋게 평가한다. 어떤 사람들은 아이가 내 삶의 이유라는 사람도 있다. 이런 말을 들어도 그리 큰 감흥이 없다. 마치 다른 차원에서 사는 사람같이 느껴진달까.  


삶을 살면서 어떤 것은 겪지 않으면 알 수 없다는 종류의 것들도 있다던데 이런 경험이 그런 것이 아닐까 짐작만 할 뿐이다.



Image by summerstock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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