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냥이 Jan 01. 2024

엄마랑 조카랑 해외여행 가지 마세요

모든 어른은 언젠가는 아이였다.

곧 환갑을 맞이하는 엄마와 큰누나의 딸인 초등학교 1학년 조카 L을 데리고 라오스 여행을 다녀왔다. 적어 놓고 봐도 참으로 특이한 조합이다. 나도 이렇게 될 줄 몰랐다. 원래는 해외여행을 갈 생각이 없었다.

   

엄마는 나와 해외여행을 가고 싶어 했다. 나를 좋아하기도 하고 삼 남매인 우리 중 큰누나와 작은누나랑은 같이 간 적이 있는데 나랑은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인생의 마지막이라며 눈을 마주치는 엄마에게 차마 냉정하게 고개를 저을 순 없었다.


이렇게 무언의 승낙 후 우리의 여행 소식이 가족 전체에 퍼졌다. 그런데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조카 L이 여행인원에 포함돼 있었다. 큰누나가 엄마에게 바람을 넣었다고 생각했는데 나중 보니 손녀에게 다양한 경험을 쌓아주고 싶다는 엄마의 오지랖이 발휘된 거다.


큰누나와 매형도 왈가닥인 L을 나흘간 맡아준다고 하니 쌍수를 들고 환영했을 게 눈에 보였다. 어쩐지 웃으면서 300달러나 환전해서 주더라. 그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속으로는 내 의견도 묻지 않고 진행하는 엄마가 원망스러웠지만 어쩌겠는가. 결국 나는 엄마 보호자 겸 보모 노릇이 확정됐다. 그럼에도 해외에 아직 초등학교 1학년 밖에 안 된 어린 여자아이를 데리고 간다는 점은 부담이 됐다.


부모가 괜찮다고도 했고 물론 패키지여행이니 큰 문제가 있을까 싶었지만 만약 조카가 다치기라도 한다면 큰누나와 매형에게 무슨 낯짝으로 얼굴을 들겠는가.


이런 스트레스로 여행을 가기 전까지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수십 번도 넘게 고민했다. 그러다 마침내 가기로 했다. 언제 이런 멤버로 여행을 가보겠냐 생각에서였다. 이때 나를 말렸어야 했다. 인터스텔라에서 주인공이 과거 자신에게 멈추라고 했던 장면이 떠오른다.     


애와 엄마를 데리고 가는 여행이 쉽지는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그것은 내 상상 그 이상이었다. 그전에도 힘든 여행을 해봤다고 나름 자부해 왔던 터다.


이십 대 초반에 부산에서 땅끝마을까지 친구와 싸우며 이삼십 킬로씩 걸어가기도 했고 한 달 동안 부족한 돈을 가지고 제주도 올레길을 주파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런 건 이번 여행에 비하면 힘든 것도 아니었다. 그때는 육체적으로는 힘들지만 정신적으로는 건강했다.  

  

그러나 노모와 초등학생이란 조합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나를 극한까지 밀어붙였다. 패키지여행이라 괜찮다고 생각했던 내 안일함이 원망스러웠다. 여유롭게 가이드 지시를 따라다니면 만사 오케일 줄 알았다.


그런데 패키지 일정이 이렇게 빡빡할 줄 몰랐다. 새벽부터 밤까지 일정이 꽉 차 있었다. 둘째 날에는 스님들에게 밥을 공양하는 탁발을 한다고 새벽 다섯 시에 기상해서 저녁 열 시에 호텔에 들어간 적도 있다. 별이 네 개, 다섯 개라는 좋은 호텔도 큰 의미가 없었다. 어린 아이고 성인이고 침대에 머리만 대면 잤다.

   

패키지는 우리에게 에너지를 남겨두지 않는다. 마치 에너지를 얼마나 끝까지 쥐어짜는 게 패키지 회사의 경쟁력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우리는 다른 나라를 침략해 대제국을 이룩하려는 몽골군처럼 움직였다.      


한 시도 가만히 있을 틈이 없었다. 새벽부터 일어나 버스로 한 시간이 넘게 간 곳에서 사진 찍고 한 이십 분 정도 있다가 다른 곳으로 버스를 타고 똑같은 행위를 반복했다. 나중 되니 내가 오늘 어디를 다녀온 건지도 헷갈렸다. 가이드는 노련하게 쉴 틈 없이 손님들을 몰아붙였다. 관광지보다는 오히려 버스 같은 이동수단에서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런 빡빡한 일정에 놀라 패키지를 자주 다닌 엄마에게 원래 이러냐고 물어봤는데 원래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이번 여행을 함께한 분들을 보면 대다수 60대 이상의 분들이던데 어떻게 이런 일정을 소화하시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이런 타이트한 일정과 더불어 엄마와 애를 데리고 다니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엄마는 삼십 분마다 지금 몇 신지 물었다. 이것을 답하면 다음 일정이 뭔지 몇 시에 밥을 먹는지 물었다.      


이것을 삼십 분마다 반복했다. 하루에 같은 얘기를 수십 번씩 들으니 노이로제가 걸릴 것 같았다. 속으로 “엄마 나도 몰라!!!”를 몇 번이나 외쳤는지 모른다. 시계로 태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다.    

  

나중에 알게 됐는데 부모님 해외여행 금지 십계명 중 일 번이 "아직 었냐"다. 나만 이런 고통을 겪은 건 아닌가 보다. 같이 간 조카도 신경 쓰이긴 매한가지였다. 워낙 힘이 넘치고 자유분방해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는데 저러다 넘어지진 않을까 싶어서 신경이 계속 곤두서있었다.      


가뜩이나 라오스 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차들과 오토바이들이 중앙선을 넘어 다니는 일은 일상이어서 혹시나 사고가 나지 않을까 L에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소소한 사고들은 계속 터졌다.     


비행기에서 물을 엎고 기차에선 콜라를 엎었다. 거기다 빡빡한 일정에 피곤하다고 짜증을 내니 나도 힘들어 죽겠는데 이런 투정까지 받아줘야 해서 열불이 터졌다. 그럼에도 애기한테 뭐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렇게 감정노동까지 하니 호텔에 들어갈 때쯤 되니 울고 싶더라.      


힘들었다. 현실을 잊고 다른 풍경과 분위기를 즐기게 여행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번에는 이런 경험을 거의 하지 못했다. 놀러 가기보다는 일하는 느낌이었다. 첫날에는 이런 기분에 다시는 이 멤버로 여행 오지 말아야겠다는 속으로 다짐했다.      


“애들은 왜 이렇게 지 하고 싶은 대로만 할까?”란 생각이 들어 엄마에게 물었더니 원래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렇긴 하지 그래서 애들이겠지. 엄마는 그런 모습도 이뻐 보인다다. 손녀라 그런가. 하지만 이런 엄마도 나중에 피곤해지니 짜증 내긴 하더라.


그리곤 엄마에게 “나도 저랬어?”라며 물었다. 사실 나는 안 그랬을 거란 생각이 깔려있는 물음이었다. 그런데 나도 똑같았단다. 부정하고 싶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난 세상 온순한 아이였을 것 같았다. 그런데 엄마가 아니라니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때 내가 내 모습을 본 게 아니니깐.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는 게 이런 건가 싶었다. 나만 이렇진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모든 어른은 언제 적엔 아이였으니까.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과 어른들의 배려를 받으면서 성인으로 자라난다. 나 역시도 그랬고 모든 어른들이 그랬다. 이렇게 까지 생각이 이어지니 좀 더 세상으로부터 받았던 사랑을 베풀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이런 멤버로 또 여행을 올 거냐고 묻는다면 쉽사리 대답하긴 어려울 것 같다. 깨달음은 깨달음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갈 때가 되니 나름 이번 여행 나쁘지 않았다는 생각도 든다. 인간이 왜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지 알겠다. 만약 갈 수밖에 없다면 다음에는 패키지 말고 자유여행을 가고 싶다. 기억에 남는 게 하나도 없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