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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냥이 May 10. 2024

내게는 불편한 천사 같은 D과장.

어버이날 기념으로 처가 식구들과 인천대공원에서 닭백숙을 먹었다. 2차로 근처에 있는 베이커리 카페에서 커피와 빵까지 해치웠다. 이렇게 빵빵해진 배로 아내와 함께 집에 가는 중이었다. 1차에 맥주를 먹어서 운전은 아내가 했다. 


집 근처에 있는 주행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사거리만 통과해서 우회전하면 집에 도착이었다. 신호가 바뀌려던 찰나 조용한 차 안에서 카톡음이 울렸다. 화면을 보니 “도량아 이거 장비 이렇게 쓰면 되나?”란 내용이 떠있다. 회사 D과장이었다.     


카톡이 온 걸 보고도 확인하지 않고 머뭇리는 나를 본 아내가 얼른 답장하라고 재촉했다. 이런 건 빨리 대답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녀 말이 옳다. 이런 건 바로 답장하는 게 맞다. 그래야 내 마음도 편하고 상대방도 기다리지 않고 다른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있다.       


이런 이성의 논리와는 별개로 내 손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몸이 아닌 마음 문제였다.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는 나에게 아내는 전화로 회신하라고 다시 한번 재촉했다. 그제야 나는 D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곤 이 내용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 답변했다. 모든 일이 잘 마무리 됐지만 전화를 끊고도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이런 마음이 모른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해서 그런 줄 알았다. 무지를 인정하는 건 불편한 일이다. 아는척하고 싶은 욕구와 상대방이 이런 것을 모른다고 날 깔보거나 무능하게 생각하면 어쩌지? 란 공포를 이겨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들이 전부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이 전화를 걸었다면 훨씬 더 마음 편하게 모른다고 대답했을 거다. 그런데 D과장에게 내가 보인 반응은 이런 범주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난 왜 그에게 이런 과민반응을 보이는 걸까?      


난 그와 이번 부서에서 처음 만난 게 아니다. 그는 내 직장 첫 사수였다. 그때 그는 대리였고 나는 그 부서에 온 지 얼마 안 된 신입이었다. 다른 곳에서 일하다가 회사에 들어온 그는 일반 대리들에 비해 나이가 열 살 정도 많았다. 기본적으로 부드러운 말투를 가진 그가 싫지 않았다. 가슴 한편엔 그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상사들에게 깍뜻했다. 사무실에 오자마자 살갑게 인사하고 근황을 물었다. 각자가 챙겨할 물품들도 일일이 챙겼다. 운전도 본인이 도맡아 했다. 언젠가 그가 나중에 일 안 하는 선배를 만났을 때도 그들도 한 때는 우리처럼 했기 때문에 지금 일을 안 하더라도 이해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했던 것도 기억난다.      


이런 내용만 보면 그는 천사다. 그를 불편해하는 내가 빌런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같은 조에서 일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를 좋아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는 친절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바로 밑에 있던 내 상황은 조금 달랐다.  


그는 모든 일을 다했다. 심지어 본인이 담당이 아닌 내 일까지 챙겼다. 나는 이런 상황이 불편해 그에게 내가 한다고 말해도 그는 한사코 괜찮다고 말하며 불도저같이 일했다. 일도 할 줄 모르는 신이었던 나는 더 강하게 이야기하진 못했다. 이렇게 일을 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할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았다. 


내가 맡은 몫을 하지 못한다고 느끼니 직장 내 자존감이 떨어졌다. 이런 점을 극복하고자 이해가 안 가거나 모르는 내용을 그에게 물었지만 돌아오는 건 조금 더 생각하면서 질문을 하라는 핀잔이었다. 그러면서 본인도 맨땅에서 일을 힘들게 배웠다며 말했다. 

     

회사는 학교 아니다. 알아서 일을 찾아서 하는 게 맞다. 그런데 이제 회사에 들어온 신입에게 그렇게 하는 게 맞나 싶었다. 어느 정도 가이드라인은 제시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이렇게 모르면 모른다고 뭐라고 하고 물어보면 핀잔을 주는 상황이 이어지자 더는 그에게 질문을 하지 않게 됐다.


한 번은 술을 싫어하는 내가 개인적으로 그에게 술 한잔 하자고 용기 내어 말한 적도 있다. 물론 거절당했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진지하게 퇴사를 고민한 게 이 때다.  아마 이런 생활이 몇 달 정도 더 길었다면 퇴사를 결심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이런 시간이 길지는 않았다. 함께 일한 지 세 달이 채 안 됐을 때쯤 부서이동으로 그와 헤어지게 되었다. 그는 다른 부서로 갔고 새로운 사람이 왔다. 이때부터 일을 배우기 시작했고 한 사람 몫을 다할 수 있게 됐다. 전보다 바빴지만 마음은 편안했다. 


그러다 이번에 옮긴 부서에게 그를 다시 만나게 됐다. 다행히 같은 조는 아니라서 많이 만날 일은 없다. 하지만 그를 볼 때마다 불편했던 이유를 알겠다. 그를 볼 때마다 이도 저도 못하고 무력했던 그때의 내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는 내가 그때 괴로워했다는 걸 모른다. 어쩌면 이런 업무 전화를 나에게 하는 걸 봐서는 나를 좋아할지도 모른다. 이런 걸 보면 신기하다. 가한 사람은 없는데 당한 사람은 있다. 그렇다면 내가 받았던 상처는 무엇이었을까. 

     

※ 이 글에 나오는 인물의 이름이나 직급, 장소들은 작가에 의하여 모두 임의 변경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그림 출처 : Ai Copi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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