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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이냐

by 도냥이

오늘도 나는 도서관으로 출근한다. 8시 50분에 집에서 나와 도서관으로 향한다. 도서관은 집에서 30분 거리다. 도서관에 도착해 시계를 보니 9시 20분이다. 자리에 앉아 공부할 책들과 필통, 데일리 리포트를 책상 잘 보이는 곳에 올려 둔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서 도서관 화장실 근처 정수기로 간다. 펄펄 끓는 커피가 반쯤 담겨있는 텀블러에 찬물을 붓는다. 다시 자리로 돌아와 데일리 리포트를 작성한 후 책을 보거나 취업 공부를 한다. 그렇다 나는 취준생이다.


콜센터에서 일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궁금해 읽게 된 이 책에서 나는 의외의 일격을 당했다. <콜센터>가 나의 처지와 위치에 대해서 다시금 떠올리게 만들었다. 내가 취준생으로써 느끼는 비애를 소설에서는 이렇게 표현한다.


주리는 1년 8개월 동안 한 가지 시험에 매달리는 시현을 보면서 시현이 어서 아나운서 시험에 합격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언젠가 식당 한구석에서 텔레비전에 나오는 시현을 보면서 20분짜리 점심 식사를 할 생각을 하면 정신이 아득해졌다. /18p


도서관에는 나와 같이 취업을 준비하는 친구 K가 있다. K는 직장에서 일하다가 상사와의 갈등으로 퇴사한 후 다시 취업을 준비하고 있다. 그런데 생각보다 취업이 길어졌고 지치거나 힘들 때면 나에게 종종 미래에 대한 불안을 표출한다. 그러면 나는 K를 위로해주곤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나 역시 불안에 하고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곧 내 처지에 대해서 비관하게 된다.

형조에게 콜센터는 정류장이었다. 다른 곳에 닿기 위해 잠시 머무는 곳. 다른 곳이란 ‘더 좋은 곳’이었다. /152p


나에게 정류장은 도서관일 것이다. 그러나 형조와는 다르게 도서관에서 보내는 시간이 나에겐 너무 소중하다. 10억을 준다 해도 바꾸지 않을 것이다.(100억은 노코멘트다.) 물론 누군가에 돈을 받고 안 받는다는 어마 무시한 차이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만약 운 좋게 버스를 탄다 하더라도 버스 안에서 어려움은 없을까? 그리고 항상 종점은 있기 마련이다. 특히 21세기는 잦은 환승을 요구한다.


이런 시대적 상황과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는 버스 정류장에서도 즐길 필요가 있지 않을까. 즐길 수 없는 환경이면 즐길 수 있도록 조금 더 좋게 정류장을 만들고 떠나야 하는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언젠가는 내가 그 정류장에 돌아와야 할 수도 있고 소중한 사람이 그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릴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나는 취준생이다. 하지만 영원히 취준생은 아닐 것이다. 불안이 때때로 내 마음을 갉아먹지만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사실은 시간을 이렇게 보내는 데 후회가 없다는 것이다. 소설에 나오는 말로 마무리를 짓겠다.


미래란 것은 현재에 충실하다는 전제하에 기대해볼 수 있는 것 아닐까.


Image by Free-Photos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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