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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냥이 Jul 27. 2023

삶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

인생에 바운더리를 넓히자.

서른이 넘어도 싫은 게 많다. 나이가 들수록 무던해진다는 말도 있는데 나에겐 해당되지 않는 말 같다. 오히려 싫어하는 것들은 더 많아지고 선명해진다. 예를 들어, 난 덩치 큰 남자도 싫고 소음에도 예민하다. 전자는 초등학교 때 당했던 학폭 때문이고 후자는 몰입을 깨뜨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건장한 남자가 내 옆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건 내겐 엄청난 스트레스다. 이런 점에서 내가 대학교 때 남자들이 우글거리는 음악감상동아리였다는 점은 참 아이러니하다.


그럼에도 가장 싫어하는 것 고르기 월드컵을 한다면 1위는 내가 삶에 통제권이 없다고 느낄 때가 될 것이다. 난 이런 상황이 가장 무기력하고 괴롭다. 한 번 이런 상태에 들어가면 기분이 한없이 아래로 추락한다. 발목에 로프를 묶지 않고 번지점프하는 것과 같다. 얼굴엔 “세상에서 가장 우울한 사람은 나다.”라고 써놓고 다닌다. 이런 우울함을 알아봐 달라고 주변 사람에게 신호를 보낼 때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눈치채지 못한다. 사람들은 남들에게 우리 생각보다 더 관심이 없다.      


심리학에는 학습된 무기력이라는 개념이 있다. 무기력을 피하기 위한 시도가 번번이 수포로 돌아갈 때 이런 상태에 벗어나기 위한 노력도 안 하게 된다는 개념이다. 쥐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쥐에게 전기충격을 계속해서 가했다. 이 쥐는 어떤 방법으로도 이  고통을 피할 수 없었다. 다시 이 쥐로 어떤 선을 넘어가면 고통을 피할 수 있음에도 쥐는 가만히 앉아서 고통을 받고서만 있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본인이 상황을 주도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하면 이런 노력조차 하지 않게 된다.      


내 이런 무력감의 시작은 어릴 때 둘째 누나와 이어져 있다. 우리 집은 삼 남매로 막내인 나는 큰누나와는 여덟 살 작은 누나와는 세 살 차이가 난다. 첫째 누나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그런지 내 말도 잘 들어주고 잘해줬다. 유일하게 누나가 화낸 적은 초등학생인 내가 누나가 끓여준 라면을 한강이라고 불평할 때 밖에 없었다. 문제는 둘째 누나와의 관계였다.      


누나는 나를 싫어했다. 커서 들었는데, 그때는 사랑을 뺐어 간 내 존재 자체가 싫었단다. 그리고 나에게 이런저런 요구를 해댔다. 주로 개인 심부름이 많았다. 메뉴는 떡볶이 떡부터 화장품까지 다양했다. 그래도 이런 심부름들은 할 만했다. 귀찮기는 하지만 몸이 좀 고생하면 될 일이었다.      


문제는 누나의 오락가락하는 성격이었다. 그녀는 어떤 때는 기분이 좋았고 어떤 때는 나빴다. 동일한 내 행동에도 어떤 때는 괜찮았고 어떤 때는 문제가 됐다. 이런 사람 옆에 있으니 자연스레 눈치를 보게 됐다. 누나이기 때문에 피할 수도 없었다. 학교에서 집으로 등교할 때 누나 방문을 가장 먼저 봤다. 누나 기분이 어떤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누나와 유년시절을 보내며 많은 일을 겪었다. 게임을 하고 있는 누나가 컴퓨터를 비켜주기를 기다리며, 여덟 시간 동안 그 옆에서 기다린 적도 있었다. 엄마가 그 모습을 보다가 못 참아서 누나에게 한소리하고 누나는 다시 나에게 한 소리해서 중간에 끼어 난처했던 기억도 난다. 다 기다리니 밤 11시가 넘어서 엄마가 자라고 해서 서러워 더 하고 잘 거라며 반항했던 게 생각이 난다. 서러운 마음에 컴퓨터를 붙잡고는 있었지만 게임은 하나도 즐겁지 않았다.     


이런 일들을 참다못해 초등학교 6학년 때 가출했던 기억도 난다. 제대로 된 기억인지는 모르겠지만 부엌에서 식칼을 꺼내서 “나 죽을 거야”라고 협박했던 것 같다. 이걸 보며 “찔러봐”하며 누나는 되려 성을 냈다. 그리고 나는 이런 누나를 피해 집을 나왔다.      


비가 내리는 날이어서 이를 피하려고 나무가 많았던 숲 같은데 숨어 있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는데 나무에서 떨어져 비 맞은 채 죽어 있는 새가 보였다. 그 모습이 왠지 내 모습 같아 조용히 다시 집에 들어갔다. 조마조마하면서 들어갔지만 아무도 내 짧은 가출에 대해 몰랐다.     


이런 무분별하고 무차별적인 요구들은 어린 나에게도 부당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불행했던 점은 내가 이런 부당한 요구에 거절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던데 있다. 우리 부모님은 자식에게 사랑은 줬지만 누군가의 적의에 저항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으셨다. 아마 부모님도 몰랐던 것 같다. 부모님은 누군가의 적의에 묵묵히 소리 내지 않고 견뎌냈다. 나도 이 모습 보고 배워 누나에게 똑같이 했다.      


컴퓨터 하다가 비키라면 비키고 심부름 다녀오라고 하면 바로 다녀왔다. 그것도 싫은 내색하지 않았다. 이런 감정 노동에는 에너지가 많이 들었다. 그럼에도 이런 일들이 지속되자 나도 지쳤던 것 같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고통을 묵묵히 견뎌내는 인간은 망가지기 십상이다.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가슴 한편에 마음은 스크래치가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지금도 작은 누나와 통화할 때면 왠지 모를 어색함이 있는데 이때의 영향이라고 생각한다. 


중학교 때는 누나 말을 거절하고 싶은 대도 그러지 못한 내 모습이 싫어서 샤워실에서 펑펑 운 날도 있었다. 우는 소리가 들릴 까 샤워기를 최대한으로 틀어 놓고 숨죽여 울었다. 순간 죽어버릴까란 생각이 머리에 스쳤다. 그럼 누나가 자기 행동을 후회하진 않을까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할 정도면 나에게 그렇게 하진 않았을 것 같아 개죽음만 될 것 같아 시도하진 않았다.     


실은 그럴 용기도 없었다. 마음이 천천히 고장 나고 있었다. 한 번 고장 나 버린 몸이 원래 상태로 돌아오지 않듯이 마음도 비슷하다. 이런 일들을 겪고 난 후에 나는 붕어빵 틀에 찍힌 것처럼 계속해서 무기력을 만들어낸다.                


성인이 되고 결혼도 한 지금도 이런 상황을 피하고자 일에서나 관계에 있어서 내 통제력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종종 잃어버리고 만다. 예전에는 이런 상태에 놓이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아서 손톱 위 살에 피가 나고 손톱이 변형될 정도로 물어뜯곤 했다. 그리고 강박적으로 게임 같은 자극적인 것들을 찾았다. 당연히 이것은 문제해결에 도움이 안 됐다. 남들이 볼 때는 멀쩡했지만 속에서부터 난 썩어가고 있었다. 이런 통제력을 되찾은 건 취업준비할 때였다.     


꾸준히 뭔가를 해본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난 솔직히 취업 준비를 많이 하진 않았다. 하루에 15분만 한 적도 있었다. 다만 꾸준히는 했다. 나가기 싫은 날에도 매일 나갔다. 그리고 또 독서를 하고 블로그에 서평이나 일기 같은 글을 썼다.  이런 분야는 누군가 나를 평가하는 것도 아니고 내 속도에 맞춰 내가 진행해 나갈 수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런 것들이 통제할 수 있는 분야를 넓혀준 것 같다. 취업 준비가 잘 안 될 때도 다른 분야에서 꾸준히 하니 삶의 안정감이 있었다. 그때는 자기 위안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내 이러한 행동 덕분에 취준기간을 무사히 이겨낸 것 같기도 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떤 일을 자신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면 아무래도 세계가 부글부글 끓어서 바짝 졸아듭니다. 온몸이 긴장하고 발걸음이 무거워져 자유롭게 움직이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몇 가지 시점에서 자신이 선 위치를 바라보게 되면, 바꿔 말해 나 자신이라는 존재를 뭔가 다른 체계에 맡길 수 있게 되면, 세계는 좀 더 입체성과 유연성을 갖기 시작합니다.


Image by WOKANDAPIX from Pixabay

책 :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현대문학,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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