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akeone Jan 27. 2016

눈/벽돌/미나리

신청해주시는 소재로 짧은 이야기를 만들어 드립니다.

지긋지긋한 눈이 또 내린다. 얼마 전에 회사에 지각을 할 것 같아서 눈이 얇게 얼어있는 것을 못 보고 급하게 가다가 크게 넘어져서 허리가 욱신거린다. 당장이라도 내 눈앞에 있는 이 새하얀 쓰레기들을 치워버리고 싶은 마음만 가득하다. 나는 짜증 나는 마음에 바닥에 작게 뭉쳐있는 눈 뭉치를 냅따 걷어차버렸다.


그때 옆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이가 갑자기 모든 걸 잃은 듯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아이의 작은 손에는 눈사람의 얼굴에 쓰일법한 소품들이 들려있었고 미안해져서 아이 손을 붙잡고 한동안 달래느라 진을 뺐다. 그날 밤까지 계속 그 아이의 표정과 행동들이 불편할 정도로 자세히 머릿속을 돌아다녔다. 그 모습은 나의 어릴 때의 모습과 너무 비슷하게 느껴졌다.


나도 한때는 그 아이와 같았던 때가 있었다고 생각하니 새삼 어색하고 내 안에는 그 아이와 같은 모습은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 같아서 씁쓸해졌다. 나는 옛 기억을 떠올려보기 위해 어릴 때부터 수집했던 나만의 비밀상자를 열어봤다. 그 안에는 어릴 때부터 받은 편지나 아기자기한 선물들이 들어있었다. 그런데 왠지 뭔가 빠져있는 것 같이 허전하게 느껴졌고 나도 모르게 버럭 엄마에게 짜증을 내 버렸다. 


어릴 때 우리 집은  지어진 지 오래돼서 남들은 곧 쓰러질 것 같다고 놀리기도 했지만  담벼락에는 동네 아이들의 낙서가 가득해서 마치 온동네 사람들이 같이 쓰는 커다란 칠판처럼 사람들이 소통할 수 있는 통로가 되어주기도 했고 비가 많이 오는 날에는 빗물이 집안으로 세어 들어왔지만 그것조차 나에게는 마치 동굴 속에 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놀잇감이었다.


그런 사소한 것 하나까지 정들어버린 집이었는데 어느 날부터 양복을 빼입은 사람들이 친절하고 차분한 말투로 재개발을 해야 하니 집을 비워달라는 삭막한 말을 내뱉고 사라지곤 했다. 우리는 얼마 후에 집을 비워야 했고 나는 너무 아쉬워서 그곳에 혼자라도 남고 싶다고 바락바락 우겨봤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나는 뭐라도 추억하고 싶었고 담벼락의 벽돌 파편이 떨어져 있는 것을 내 비밀상자에 넣었던 것이 기억났다.


그 벽돌에는 아이들의 낙서 자국도 남아있고 우리 집의 모든 추억의 파편들이 고스란히 잠들어 있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 벽돌 파편을 비밀상자에 넣어서 잘 숨겨 놨는데 어느 날 보니 사라져 있었고 한참 후에야 어머니께서 집안을 정리하다가 웬 쓰레기가 있어서 버렸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그 이야기도 이미 예전에 듣고 털어버렸다고 생각했지만 다시 비밀상자를 열어보니 버럭 화가 나서 짜증을 내버렸다. 이제는 되돌릴 수도 없는 일이라 포기해버렸다. 며칠 후 쉬는 날 나는 예전에 살던 그 벽돌집에 찾아가보기로 했다. 벌써 상당한 시간이 흘렀는데도 동네가  재개발되기는커녕 어찌 된 일인지 타임머신을 타고 온 듯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그곳은 모양은 예전 그대로였지만 사람은 살고 있지 않아서 마치 어떤 지독한 저주에 걸려서 동네가 통째로 박제가 되어버린 듯한 묘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사회를 조금 알아버린 지금 다시 이곳을 돌아보니 도저히 사람이 살만한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개미 한 마리 살아도 용하다 싶을 정도로 삭막해 보였다. 내가 추억하던 모습은 아무것도 모르던 내가 기억하는 모습이라 상당히 많이  미화됐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씁쓸함을 안고 되돌아가려다가 여기까지 온 이상 예전에 살던 집에 들어가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죽어버린 듯한 집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곳에는 당장이라도 누구나 온다면 살아갈 수 있다고 시위라도 하듯이 미나리들이 눈부실 정도로 쾌청한 녹색을 내뿜고 있었다.


잠시 후 웬 아이가 와서 물어보니 자기가 아직 근처에 살고 있고 우리 집에 우연히 왔다가 천장 틈으로 떨어진 고인물에 학교에서 실습용으로 받아온 미나리를 키운 후부터 조금씩 자리를 넓힌 것이라고 했다. 설명을 해준후 그 아이가 뿌듯한 미소를 하고 잘 자라고 있는 미나리들을 친구라도 되는냥 순수하게 바라보는 모습에 빠져들었다. 아이는 미나리를 보고 나는 아이를 보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있다가 집에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밖으로 나오는데 하늘에서 눈이 내려왔다. 그 순간 바라본 눈은 지긋지긋한 새하얀 쓰레기가 아니었다. 내 손가락 끝에서 내 체온조차 뜨겁다는 듯이 희미하게 녹아버리는 눈을 바라보며 순수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렇게 집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도 깨끗이 잊은 채 하염없이 떨어지는 눈송이를 바라봤다.




누구나 소재 신청 가능합니다. 

아래쪽 글을 참고하시고 신청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https://brunch.co.kr/@ehdwlsez4ge/1


작가의 이전글 라디오/사이다/우주/스키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