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동준 Mar 09. 2021

법의 사각지대

레 미제라블이 말하는 법, 양심, 그리고 사랑

    1776년,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메리카 대륙의 13개 주가 한 자리에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그로부터 11년 뒤인 1787년에 드디어 미국의 헌법 (Constitution of the United States)이 탄생하게 된다. 이때 만들어진 미국의 헌법은 현대 정치와 문화의 중심이자 “자유와 권리”라는 키워드의 뿌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미국헌법의 전문(Preamble)은 단순히 미국뿐만이 아니라 전 인류에 헌법이 존재하는 이유를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다. 다음은 미국헌법의 전문을 번역한 것이다.

 “우리 미국 국민은 더 완전한 연합을 형성하고, 정의를 확립하며, 국내의 평안을 보장하고, 공동 방위를 제공하며, 국민 복지를 증진시키고, 우리와 우리의 후손들에게 자유의 축복을 보장하기 위하여, 이 미국 헌법을 제정한다. (The Preamble of the United States Constitution)”

 

이 전문을 통해 드러나는 법의 가장 중심적인 목적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바로 공동체의 안정을 유지하는 것과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다. 공동체 전체의 안정을 위해서는 모두가 지켜야 하는 규율을 법으로 제정함과 동시에 처벌이라는 수단을 통해 사회를 통제하고, 개인의 자유를 위해서는 그들의 의견을 표출하거나 그들만의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법적으로 정확히 명시해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회적 통제와 개인의 자유라는 두 가지 목적은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 상관관계에 놓여져 있다. 양을 가두어 놓는 울타리가 있다고 생각해보자. 만약 양들이 더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도록 울타리를 넓혀준다면 이전보다 그 양들을 통제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생길 수밖에 없으며, 반대로 그 양들을 더 안정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울타리를 좁힌다면 그들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공간 또한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처럼 누군가를 통제함과 동시에 그들에게 자유를 허락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 한계성을 맞이할 수밖에 없으며, 사회도 지금 법의 통제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법의 한계성, 다시 말하자면 법전에 적힌 것들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사건들을 직면하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사건들을 보면서 법의 한계성에 대해 정확히 인식하고, 그 한계성을 해결해줌과 동시에 법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것들을 발견할 필요가 있다.




    법의 첫 번째 한계는 앞서서 이야기했던 법의 두 목적이 서로 충돌하는 현상이다. 1832년 6월, 프랑스에서 큰 폭동이 발생했다. 많은 노동자들이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정부를 향한 시위를 일으켰고, 그 중심에는 자유와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반란을 주도하던 청년들이 있었다. 하지만, 정작 정부는 그들에 의해서 발생하는 사회적 혼란을 해결하기 위해 그들의 폭동에 총을 겨누었고, 결국 이틀만에 73명의 진압군과 93명의 시위대가 사망하면서 봉기는 실패로 끝나게 된다. 이런 방식의 시위는 규모만 다를 뿐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한쪽은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며 그들의 요구사항을 여러 방식으로 전달하지만 또 다른 한쪽은 그들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 불안정을 해결하기 위해 진압을 시도한다. 과연 어느 쪽이 선한 것일까? 프랑스 6월 혁명에 대한 이야기를 책으로 남긴 과거 프랑스의 한 작가가 이 질문에 대한 자신의 대답을 남겼다.

“바리케이드의 최후가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그들은 무엇을 하려고 여기에 온 것일까? 누구를 비난해야 하는가? 아무도 아니고, 또한 모든 사람이다. 비난해야 할 건 바로 이 불완전한 시대다. (레 미제라블 pg.513)”    


두 번째 한계는 법의 객관성에 의해 나타난다. 대법원에 가면 정의의 여신상이라는 동상을 볼 수 있다. 물론 나라마다 다르긴 하지만 보편적인 정의의 여신상은 눈을 가린 채로 서 있는데, 이는 법적 판결이 당사자의 사회적 위치 혹은 개인적인 사정과는 상관 없이 오로지 객관적인 기준에 의거해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러한 법의 객관성이 때로는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때가 있다. 누군가는 절박함 속에서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불가피하게 도둑질을 해야 하는 상황을 직면하고, 또 누군가는 법의 집행과 “전과자”라는 낙인으로 인해 인생이 망가지기도 한다. 이처럼 사람들을 위해서 존재하는 법이 때로는 그들의 앞길을 막고 있지만, 눈을 가리고 있는 정의의 여신은 그 모든 상황과 환경을 보지 못한다. 이러한 보이지 않는 영역을 “법의 사각지대”라고 부르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 법의 사각지대를 없애기 위해 법을 더 세세하게 그리고 더 많이 제정하면 오히려 역효과를 낳을 수가 있다. 우리는 법이 “최소한의” 도덕적 기준이라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공동체 안정과 개인적 자유 사이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인간의 권리와 자유가 사라질 수도 있다. 규제의 최소화와 사회적 안정이 병행되어야 하기 때문에 법의 사각지대가 생기는 것은 불가피한 현상이며, 이 사각지대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가 과도하게 간섭해선 안 되는 것이다. 때로는 이 사각지대를 통해 탈법적 행위를 하는 사람들을 보며 감정적인 분노와 슬픔이 생길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법을 제정하는 것에 항상 신중해야 한다. 법으로 인한 제한과 처벌이 더 구체적이고 더 많아진다면 우리는 조지 오웰의 “1984”에서 그려진 디스토피아에 점점 더 가까워질 것이다. 그곳은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감시를 받고, 자녀가 부모를 고발하며, 인간의 자유와 가치가 붕괴된 사회이다.




    결국, 이 법의 사각지대는 법이 아닌 다른 것으로 해결을 해야 하는데, 필자는 그것의 실마리를 두 개의 책에서 찾을 수 있었다. 하나는 앞서 언급했던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Les Miserable)”이며 또 하나는 모든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성경책이다. 이쯤에서 잠시 성경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려고 하는데, 혹자는 종교서적을 인용하는 필자를 보며 ‘신앙이나 개인의 주관적인 믿음을 기반으로 한 종교적 인용은 객관적이지 못하다’라고 비판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성경은 교회와 종교라는 공간을 초월해서 이미 전 세계적인 영향력을 끼친 서적이고, 이는 법과 정치의 측면에도 동일하게 해당된다. 영국의 철학자 존 로크는 “통치론(Two Treatises of Government)”이라는 정치 철학 서적을 통해 인간의 권리와 평등에 대한 이론을 정립했는데, 그 모든 것들의 기반은 성경의 “창세기(Genesis)”였으며, 이와 함께 120여개의 성경구절이 인용되었다. 이렇게 완성된 통치론은 민주주의 사상의 원형으로 불리며 미국의 독립선언과 프랑스의 인권선언에 아주 큰 영향을 미쳤다. 뿐만 아니라, 과거 미국을 건국했던 지도자들이 존 로크의 통치론보다 약 두 배 이상 인용한 책은 구약성경의 “신명기(Deuteronomy)”였다. 이들은 성경의 내용을 단순히 종교, 신앙, 믿음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 아니라 실제 정치 철학에 적용 가능한 지식과 지혜로 여긴 것이다. 그렇기에 성경은 개인의 종교가 아닌 학술과 사실의 관점에서도 충분히 다뤄 볼 수 있는 서적인데, 그렇다면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성경에서는 법의 사각지대에 대해 어떻게 서술하고 있는가? 실제로, 성경에도 법의 한계성을 이용해 예수를 곤경에 빠뜨리려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리새인”이라고 불리던 율법학자들인데, 그들은 어느 날 한 여인을 예수 앞에 끌고 와 이렇게 말한다.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런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John 8:4~5)”


만약 이 질문에 “돌로 쳐라”라고 대답한다면 그 동안 예수가 강조했던 사랑과 용서라는 가르침에 모순되는 말을 하는 것이며, “돌로 치지 말아라”라고 대답한다면 모세의 율법을 어기는 것이기에 불법행위를 명령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이는 객관성이라는 법의 한계를 악용한 수단이며, 둘 중 어떤 대답을 하던지 난처한 상황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법이라는 하나의 도덕적 기준을 잣대 삼아 평생을 살아오던 율법학자들에게 예수는 단 한 문장의 대답을 통해 그들이 그 동안 잊고 있던 또 다른 도덕적 기준을 상기시켜준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John 8:7)”


성경은 이 말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하나 둘씩 떠나갔다고 말하고 있다. 양심의 가책이란 자신이 과거 또는 현재에 어떤 잘못된 행위를 지었을 때 그것을 인식하게 해주는 하나의 도덕적 반응이다. 이는 오로지 개인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자 개인만이 갖고 있는 또 하나의 도덕적 기준인 “양심”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법이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해당되는 “객관적인 도덕적 기준”이라고 한다면, 양심은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주관적인 도덕적 기준”이며, 설령 법의 사각지대를 직면한다고 하더라도 양심이라는 또 다른 도덕적 기준을 통해 더 옳은 선택이 무엇인지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양심이 항상 옳은 도덕적 기준인 것은 아니다. 법의 뿌리인 객관성에도 한계가 있듯이 양심의 뿌리인 주관성에도 분명한 한계가 나타나는데, 이를 가장 잘 묘사한 것이 바로 레 미제라블의 테나르디에라는 인물이다. 테나르디에는 끊임없이 남들을 속이고 돈을 갈취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양심은 주관성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기에, 사람마다 갖고 있는 기준이 다 제각각이며, 테나르디에와 같이 가책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더 심각한 것은, 양심의 법을 어기는 것에는 그로 인한 처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테나르디에가 팡틴이라는 여인을 속여 수 천 만원 정도의 돈을 취하고, 자신의 이름과 신분을 위조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구걸을 해도 그는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즉,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거리낌이 없으며, 이러한 사람들을 어느 정도 제어하기 위해 법이라는 공공의 도덕적 기준이 있는 것이다. 법이 갖고 있는 또 하나의 큰 특징은 바로 “강제성”이다. 양심, 관습, 종교와 같은 사회적 규범이 단순히 심리적 압박감을 가져다 주는 것에서 멈춘다면, 법은 어겼을 때 주어지는 물리적인 제한과 구속이 있기에,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가장 강력한 사회 질서 체제인 것이다. 사회는 이 강제력을 통해 최소한의 울타리를 형성하고 이것을 벗어나 혼란을 가져오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법과 양심은 우리에게 선과 악을 분별하게 해주는 도덕적 기준을 제공해준다. 하지만, 이 두 가지는 단순히 그 기준점을 제공해주는 것을 넘어서서 사회가 불법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막는 것까지 이어져야 한다. 즉, 이는 개인과 공동체의 “교화”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교화란 누군가를 가르치고 이끌어서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양심과 법은 서로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이 “교화”라는 과정까지 성공적으로 이어지고 있는가? 레 미제라블에서 교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을 한 명 꼽으라고 한다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장발장”을 언급할 것이다. 우리는 무엇이 그를 교화시켰는지를 다시 한번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놀랍게도 그는 법의 처벌과 양심의 가책이라는 두 가지 과정을 모두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범죄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으며, 오히려 그 과정들 속에서 더 위험한 인물로 변질되기도 했다. 먼저, 장발장은 빵을 훔친 혐의로 오랜 시간 동안 교도소에 갇혀 법의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장발장의 사회를 향한 분노를 자극시켰을 뿐, 아무런 긍정적인 효과를 불러오지 못했다. 그리고, 미리엘 주교의 은식기를 훔치기 직전까지도 그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이것이 옳지 못한 행위라는 것을 인지했으나, 이 또한 그의 범죄를 막지 못했다. 다시 말하자면, 비록 법은 처벌을 통해, 양심은 마음의 가책을 통해 교화를 이끌어내려고 시도했으나, 둘 다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장발장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화시켰던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미리엘 주교의 “사랑”이다. 헌병들이 은식기를 훔친 장발장을 끌고 미리엘 주교 앞에 나타났을 때, 그는 장발장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아, 노형이구먼! 반갑소. 그런데 이게 웬일이오? 당신한테 촛대도 드렸는데 이건 왜 잊어버리고 가셨소? 이것도 은이니까 이백 프랑쯤은 받을 수 있을 거요.”


이 말과 함께 미리엘 주교는 장발장의 범죄를 숨겨주었고, 그를 용서했다. 사실, 주교의 이 거짓말은 합법보다는 오히려 불법에 더 가깝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불법은 법이 해내지 못했던 “교화”를 이루어냈으며, 이 책을 읽는 그 어떤 독자들도 주교의 행동을 악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이는 사랑이 단순히 법을 지탱해주는 것을 넘어서서 더 나은 개인과 공동체를 위해 때로는 법을 “초월”할 수도 있는 요소라는 것을 의미한다. 법은 사랑의 하위개념이다. 마치 정부의 모든 정책들이 “헌법”이라는 상위개념을 거스를 수 없듯이, 법 또한 사랑이라는 상위개념을 거스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사랑이 곧 법의 완성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 (Romans 13:8~10)”


만약 미리엘 주교가 법과 양심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면, 그는 장발장의 범죄를 헌병들에게 알리고 그를 다시 감옥으로 보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는 도덕적으로 옳은 행동이자 정의로운 선택이다. 그러나 그가 법이나 양심이 아닌 그보다 훨씬 더 위에 있는 개념인 “사랑”을 통해 장발장을 용서했을 때, 감옥에서 평생을 살다가 사회를 향한 분노만 남긴 채 죽을 운명이었던 그를 수 백 명의 가난한 사람들을 살리는 “마들렌”이라는 이름을 가진 새 사람으로 변화시킬 수 있었다.




    세상은 오래 전부터 더 완벽한 사회를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전진해왔다. 맨 처음에는 법과 처벌이라는 장치를 도입시키면서 많은 사람들의 불법행위를 근절시켰다. 그러나, 법의 객관성과 눈을 가린 정의의 여신만을 추구하던 사회는 결국 법의 사각지대를 직면하게 되고, 공정하지 못한 법적 판결로까지 이어지곤 했다. 그 이후로 사회는 법 이외에도 그들이 갖고 있는 또 하나의 도덕적 기준인 양심을 주목했으며, 그 두 가지 도덕적 기준의 상호작용을 통해 나온 결과물인 “정상참작”이라는 방법과 함께 더 발전된 정의로 나아갈 수 있었다. 단순히 법의 글자만을 기반으로 해서 남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상황과 환경까지 고려해서 어떤 것이 정말 옳은 선택인지를 판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지금도 사회는 더 정의롭고 더 올바른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해 새로운 법을 제정하거나 이전에 있던 법을 폐지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로 더 온전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원래 있던 것에 변화를 주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시선까지 돌려 보아야 한다. 마치 법의 한계성을 해결하기 위해 양심이라는 새로운 것에 주목했듯이, 지금 사회가 갖고 있는 다양한 한계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새로운 것에 주목해야 하며, 그 새로운 것, 다시 말하자면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앞으로의 여정을 인도하는 나침반은 다름아닌 “사랑”이다.

작가의 이전글 절망적인 브런치 조회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