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삶에 닿는 순간, 내 삶도 다시 살아난다
사람은 사람을 통해 깨어난다고 합니다. 저는 그 문장을 머리로 이해하기까지 오래 걸렸고, 마음으로 받아들이기까지는 더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혼자서도 잘 살아갈 수 있다고 믿었던 저는, 그 믿음만큼이나 쉽게 무너지곤 했습니다. 사회복지사로 일하며 마주한 가장 근본적인 진실은, 삶의 의미란 결국 ‘누구와 연결되어 있는가’에 달려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 저는 ‘도움’과 ‘지원’이라는 단어에 집중했습니다. 어떤 서비스를 연결할지, 어떤 제도를 적용할지, 어떤 프로그램이 적절할지를 고민했습니다. 저의 관심은 주로 ‘무엇을 줄 것인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단지 자원을 전달하는 것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곁에 조용히 ‘존재하는 것’이 더 깊은 회복을 만들어내고 있었습니다.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모든 진정한 삶은 만남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현장에서 저는 그 말의 무게를 체감했습니다. 눈빛, 숨결, 침묵, 그리고 무너지지 않기 위해 맞잡는 손길… 그 수많은 만남 속에서 저는 오히려 제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꼈습니다. 제가 도움을 주었다고 여겼던 순간들이, 사실은 저를 도와주고 있었습니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했듯, 인간은 물질 자본만이 아니라 관계 자본 속에서 삶의 자리를 형성합니다. 사회적 연대, 상징적 인정, 정서적 접촉은 보이지 않는 자원이지만, 인간을 살아 있게 만듭니다. 저는 타인의 삶에 닿는 순간, 제 안의 굳어 있던 감정들이 풀려나감을 경험했습니다. 한 사람의 이야기를 온전히 들을 수 있을 때, 저는 제 자신과 다시 연결되는 듯했습니다.
법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인간이 감정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타자와 연결되며, 윤리적 판단을 내린다고 했습니다. 감정은 사적인 차원을 넘어 사회적이고 윤리적인 감각입니다. 저는 이 일을 하며 슬픔 앞에서 멈추고, 분노 앞에서 외면하지 않고, 회복을 기다리는 일이 얼마나 깊은 철학이 되는지를 배웠습니다.
처음 저는 타인을 돕기 위해 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깨달았습니다. 그들이야말로 저를 살아 있게 만든다는 것을.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인 어르신, 폭력 피해를 견뎌낸 생존자, 방황하는 청소년, 침묵 속의 보호자. 그들은 단순히 ‘지원 대상자’가 아니었습니다. 저에게 세상의 복잡함과 인간의 위태로움, 존재의 단단함을 알려준 스승이었습니다.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을 마주하는 행위가 윤리의 시작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그 얼굴을 외면하지 않을 때, 저의 존재 또한 외면당하지 않았습니다. 관계는 서로의 존재를 존중하는 상호 응시였습니다. 사람을 깊이 만나는 일은 곧 저를 얕게 보지 않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만약 제가 사회복지사를 단순한 ‘직업’으로만 여겼다면, 그 만남들은 제 곁을 그냥 지나쳐 갔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그 안에 머물렀고, 귀를 기울였으며, 함께 앉아 있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 시간이 저를 사람답게 살게 했습니다. 저 또한 누군가에게 그렇게 기억되고 싶습니다. 크지 않아도 깊이 있는 사람, 오래 남지 않아도 결코 가볍지 않은 사람으로.
사람은 사람을 통해 깊어집니다. 어떤 이의 슬픔은 제 연민을 일깨웠고, 어떤 이의 분노는 제 정의감을 흔들었으며, 어떤 이의 침묵은 제 언어를 새롭게 만들었습니다. 타인의 삶에 닿는 순간, 제 삶도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오늘도 그 진실을 되새기며, 또 한 사람의 이야기에 조용히 귀 기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