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일상이 반복될수록, 삶의 이유를 묻는다

바쁜 일상 속에서 잊혀지는 진정한 의미

by Eunhye Grace Lee

“오늘도 무사히.” 이 짧은 문장은 어떤 날에는 위로처럼 다가오지만, 어떤 날에는 체념처럼 들리곤 합니다. 매일 반복되는 출근과 퇴근, 업무와 회의, 피로한 얼굴과 자동 응답 같은 대화들 속에서 하루가 지나가고 나면, 저는 한 가지 질문 앞에 멈추게 됩니다.


“나는 오늘, 살아 있었는가?”

숨을 쉬고, 일하고, 무사히 하루를 보냈음에도 정작 ‘살아 있다’는 감각은 제 삶 어디에도 없었던 날들. 그 반복이 쌓일수록, 저는 이 질문을 잊지 않으려 애써야 했습니다.


빅터 프랭클은 인간이 쾌락이나 권력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통해 살아간다고 했습니다. 극한의 환경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아낸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는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는 의미를 묻는 데 있다고 말했습니다. 저 또한 그의 말에 오래 머물렀습니다. 제가 겪고 있는 이 지루한 일상, 어쩌면 가장 은밀한 형태의 무의미함에 대해 진지하게 물어야 했습니다.


사회복지사의 삶은 겉으로 보기엔 의미로 가득 차 있는 듯 보일지 모릅니다. 누군가를 돕고, 관계를 만들며, 변화를 지원하는 사람. 그러나 그 일을 하는 저는 종종 피로했습니다. 보고서 작성, 끝나지 않는 회의, 반복되는 사례들 속에서 ‘살아 있는 일’이라는 감각은 점점 희미해져 갔습니다. 타인을 위한 일이라는 외형 속에서 오히려 제 존재가 흐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느낀 적도 있었습니다.


막스 베버는 직업이 단순한 생계 수단이 아니라 삶의 부름, 즉 ‘소명’일 때 인간은 존재의 이유를 찾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노동은 소명이 아니라 기계적 반복으로 흐르곤 합니다. 특히 감정노동이 중심이 되는 돌봄 직업에서는, 자신의 감정과 존재가 도구화되는 경험이 더 크게 다가옵니다. 저 역시 그런 과정 속에서 무뎌지는 저 자신을 보며 실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법철학자 조셉 라즈의 말처럼, 인간의 자유란 스스로 가치 있는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는 데 있습니다. 저는 그 자유를 제 자신에게 허락해야 했습니다. “왜 이 일을 하는가?”, “나는 이 일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단지 진로의 문제가 아니라, 내 존재를 어떻게 지속할 것인가의 문제였습니다. 의미 없는 반복은 영혼을 고갈시키지만, 의미를 부여한 반복은 삶을 지탱하게 합니다.


어느 날, 사례 회의 중 클라이언트의 한 마디가 제 마음을 멈추게 했습니다. “그냥 제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고마웠어요.” 그 말이 저를 흔들었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 반복되는 대화와 문서 작성 속에서 놓치고 있던 의미의 파편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삶의 의미는 거대한 변화나 위대한 성취가 아니라, 아주 조용한 순간, 내가 그 자리에 있었는가를 묻는 데서 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을 마주할 때 우리는 윤리적으로 응답하는 존재가 된다고 했습니다. 제가 매일 마주하는 이들, 보고서에 적히지 않는 감정들과 침묵 속의 얼굴들. 그들이 제 존재를 다시 일깨워주었습니다. 제가 그들의 존재를 수용할 때, 저 또한 제 존재를 회복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더 자주 멈추려 합니다. 바쁜 하루의 끝에서, 혹은 지친 마음의 틈에서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지금, 살아 있는가?” 이 질문은 불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저를 저답게 지켜주는 울타리가 됩니다. 의미란 누군가가 주는 것이 아니라, 제가 묻고 응답할 때 비로소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상이 반복될수록, 삶의 이유를 묻는 일은 더 중요해집니다. 그 질문이 없다면 우리는 점점 기계처럼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저는 오늘도 무사히 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저는 오늘도 ‘살아 있었다’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문장을 제 스스로에게 남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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