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센터 서류발급

정직 강박증 공무원

by 태리우스

주민센터에서 일할 때였다. 지역유지가 상급자에게 각종 서류를 대신 발급해달라고 요청을 했고 상급자는 나에게 서류를 발급하라고 전화가 왔다. 나는 당황스러웠다.

공무원은 공정하게 업무를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의 서류 발급을 위해서는 신분증, 위임장이 있어야 한다. 위임장도 없이 전화로 서류를 발급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은 방법이다.


사람들은 주민센터에 앉아서 서류를 발급하는 공무원을 보고 참 편해 보인다고 이야기하지만 그렇지도 않다.

서류의 종류도 많고 규율을 받는 법도 다양해서 요즘 같은 개인정보가 중요한 시대에는 서류 한 장 발급이 긴장의 연속일 수 있다. 그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서 퇴사를 한 직원이 있다고도 들었다.


그 공무원은 서류를 출력하고 서류의 내용이 정확한지 몇십 분을 검토하고 민원인에게 주었다고 한다. 서류를 검토하는 직원도 서류를 기다리는 민원인도 그걸 바라보는 동료직원들도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이 간다.


서류는 발급하면 그때부터 효력이 발생하고 그 서류는 나에게 돌아오지 않는다. 그 서류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는 것이다. 얼마나 무거운 책임인가.초보 공직자를 노려 사람이 많은 시간을 틈타 허위 인감을 발급받아 사기사건이 터지면 공무원도 책임이 지게 된다.


나는 상급자의 요구에 당황과 약간의 화를 섞어 거절했다. 내가 상급자의 요구를 거절한 이유는 이랬다. 각종 서류를 발급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필요한 준비물이 있다. 신분증은 기본이고 도장, 위임장 등이 있는데 필요한 준비물이 준비가 안되면 민원인은 여지없이 돌아가서 다시 철저한 준비를 하고 우리에게 와야 했다.

민원인이 초등학생이든 연세 많은 어르신이든 꼬부랑 할머니든 할아버지든 그랬다.
특히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들에게도 준비물이 준비 안되면 돌려보내는데 지역 유지라고 전화 한 통만으로 서류 발급을 해줄 수는 없었다.

그런 행동은 공무원이 하면 안 된다. 아무리 그래도 그러면 안된다. 주민센터에 앉아있으면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한걸음 한걸음 걷는 게 얼마나 힘든지 우린 앉아서 많이 본다.

젊은 사람이야 뛰어가든 자전거를 타든 집에 갔다 오는 시간이 10~15분 걸이지만
어르신들은 집에 갔다 오는 시간이 1시간이 걸릴지 2시간이 걸릴지 모를 일이다.

그래도 우린 돌려보낸다. 서류의 안전한 발급을 위해 공정한 업무처리를 위해. 그런데
상급자 백으로 전화로 중요서류를 떼 달라고?

그건 못하겠었다. 그렇게 하면 다음에 어떤 준비 안된 할머니를 어떻게 돌려보낼 수 있겠는가? 말단 공문원이지만 그것은 마지막 지켜야 할 자존심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발급을 안 해준다고 하니 상급자와의 통화해서 약간의 어색함이 흐르고 상급자의 기억 회로에 ‘이 놈 봐라’하는 메시지가 저장되는 마음의 소리가 전화기 너머 나는 생생하게 느꼈다. 전화가 어떻게 끊겼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상급자는 기분이 나쁘셨을 것이다.

사실 그 상급자님은 나에게 은사 같은 분이기도 하셨다. 소외직렬인 나를 챙겨주신 분이 시기도 하고 유별나고 특이한 나를 이해하고 감싸주신 분이시다. 감사하고 고마운 분이시다. 본인도 원치 않으셨지만 높은 자리에 있으면 거절하기 어려운 일들이 많으실 것으로 생각된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런 경우의 선택이 어렵다. 내 결정이 여전히 옳다고 생각되지만
상급자에게 죄송한 마음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관계와 원칙의 저울에서 균형을 잡기는

쉽지 않다.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기는 어려운 것이다. 아메리카노와 딸기 스무디 중에 하나는 골라야 하는 것이다.


모두가 원칙을 존중하고 공정하게 업무를 한다면 좋겠지만 우리 회색지대에 살고 있다. 흰색과 검정 사이에는 무한대에 가까운 회색지대가 존재한다. 조금 밝은 회색이 조금 더 어두운 회색에게 더 어둡다고 비난할 수 있겠는가?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돌로 쳐야 한다고 외치는 군중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자 모두가 돌아간 이야기처럼 우린 누구를 비난하거나 정죄할 수 없다.

결국에는 나의 거절로 동료가 발급을 하게 되었다. 동료가 정당하지 않은 일을 하게 된 상황에서 나의 선택은 올바른 것인가? 사실 정확히 잘 모르겠다. 융통성을 발휘하여 내가 발급했었어야 했나라는 생각도 든다.

아무튼 이일도 오래 전의 일이다. 9급 때인지 8급 때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말단 직원에게도 관계와 원칙 사이에서의 고뇌가 있는데 위로 갈수록 얼마나 심할까?

산 정상으로 갈수록 바람이 거세진다고 하는데 상상도 못 할 갈등으로 고통스러울 것 같다.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지만

승진은 하고 싶고 승진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원칙을 존중하고 정직에

대한 강박증이 있는 공무원은 나름 괜찮은

공직자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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