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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리우스 Dec 26. 2022

겨울

끝과 시작

요즘 왼쪽 무릎이 많이 아파서 걷기가 힘들어졌다. 그래서 운동화를 다른 걸로 바꿔 신었다. 단단한 에어가 있는 에어맥스 95로. 에어맥스 95는 27년 전에 나온 디자인이지만 아직까지도 인기가 있다. 나이키 운동화를 디자인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감탄하게 된다. 나도 그런 디자인을 하고 싶다. 신발을 바꿔 신고 1층으로 내려가는데 역시 무릎이 아파서 걱정이 됐다.



그런데 1층 cctv 모니터를 봤는데 세상에! 눈이 많이 내려있었다. 요즘 신었던 프레스토는 쿠션은 좋지만 방수가 안 되는 외피였는데 신발을 바꿔신어서 다행이다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했다. 눈을 맞으며 천천히 교회에 갔다. 교회에 도착하니 7시 30분 1시간이 지나고 교회를 나가려고 하니 교회 직원분들이 눈을 치우고 있었다. 나는 도서관을 가야 해서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눈이 오면 그렇게 춥지는 않다.


걸어서 도서관을 가면 아차산역과 광나루역 사이에 언덕을 넘어야 한다. 언덕 정상에는 야외무대와 운동기구들이 있는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눈이 예쁘게 와서 소복이 쌓여 있었다. 폭신한 하얀 솜털 이불 같은 눈밭에 드러눕고 싶었다. 누워서 눈이 떨어지는 하늘을 보고 싶었다. 먼저 눈이 쌓인 기다란 대리석 구조물 위를 앞으로 살짝 누워봤다. 두꺼운 장갑, 롱패딩을 입고 있어서 차가운 느낌이 들지 않았다. 지렁이처럼 몸을 꿈틀꿈틀거려 보고 일어났다.



훨씬 기다란 평평한 대리석 구조가 보였다. 거기를 포복훈련 하듯이 지나가고 싶어졌다. 앞으로 조심스럽게 누워서 포복을 해봤다. 재밌었다. 촬영을 해서 남기고 싶었다. 카메라를 새팅하고 포복으로 눈을 해치며 앞으로 기어갔다.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 더 재밌었겠지만. 혼자서도 재밌는 추억을 만들어서 좋았다. 포복 촬영을 끝내고 언덕을 내려가려니 자꾸 아쉬움이 남아서 뒤를 돌아봤다. 언덕 정상에 있는 눈 덮인 공원, 눈이 소복소복 쌓인 나뭇가지들, 하얀 털뭉치를 곱게 펴서 깔아 놓은 듯한 차가운 포근함, 세상에는 완벽한 하얀색이 없다는 말을 들었는데 눈이 흰색인 것은 참 신기한 일이다. 사진을 한번 더 찍고 언덕의 내리막길을 내려갔다.



그런데 뭔가 허전했다. 양쪽 귀에 끼고 있었던 에어팟이 오른쪽 귀에서만 느껴졌다. 설마! 왼쪽 귀를 만져봤다 없었다.

하.... 새하얀 눈밭에서 새하얀 에어팟을 잃어버린 것이다. 찾을 확률이 아주 아주 낮아졌다. 눈만 아니면 내가 포복으로 뒹굴던 곳에 떨어져 있을 하얀 에어팟을 금세 찾을 수 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묘했다. 카멜레온처럼 숨어버린 에어팟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한숨을 쉬며 포복으로 뒹굴던 장소로 다시 걸어갔다. 혹시 몰라 패딩을 벗고 넥워머와 후드티, 양털조끼를 털면서 찾아봤지만 없었다.


약간의 절망감, 후회, 자책을 하며 유력한 장소로 가봤다. 온통 눈으로 뒤덮인 여기서 찾을 수 있을까? 먼저 처음 누웠던 장소부터 봤다. 안보였다. 발로 쓱쓱 쓸어봤다.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마음속으로 찾았으면 좋겠다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발로 눈들을 이리저리 쓸어봤지만 못 찾을 것 같았다. 하얀 눈으로 기분 좋았던 상황에서 잃어버려서인지 더 속이 상했다. 못 찾겠구나 생각하는 순간!


도톰하게 쌓인 눈이불 위에 숨어있는 작은 은색빛이 보였다. 에어팟의 막대 밑부분의 크롬 부분이 분명했다. 순간  좋았던 감정과 기분이 연기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마치 어두운 방에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자 순식간에 빛으로 가득  것처럼. 천천히 몸을 숙여서 자세히 봤다. 가벼운 에어팟이 눈밭에 머리를 박은  꼬리를 숨기지 못한 모양이었다. 내가 포복으로 기어갔던 바로 옆이었다. 조금만  깊이 박혔더라면 찾지 못했을 것이다. 은색이  보였을 테고 그냥 눈밭에  작은 구멍 같은 거였으니까. 내가 발로 쓱쓱 문지르다가 다른 눈덩이에 덥혀 영영 찾을  없게 됐을지도 모른다. 하얀 눈밭에서 잃어버린 에어팟을 찾은 것은 기적 같은 일이다. 기분이 많이 좋았다. 하나님께 감사했다.



그렇게 기분 좋게 언덕을 내려와 도서관에 가기 전에 운동을 하러 갔다. 아침 금식기도를 하니 기운이 없었다. 밥을 안 먹으면 우울하기까지 하다. 기운도 없고 우울하니 검은 커튼을 친 방처럼 다시 마음의 기쁨이 사라졌다. 무릎까지 아프니 더 울적했다. 사람 마음이 방 같구나. 창문과 커튼에 따라 어둔 동굴이 되기도 하고 빛나는 세상이 되기도 하니 마음이 참 중요하구나. 그래서 성경에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는 말씀이 있구나 생각했다. 운동을 마치고 도서관에 와서 점심을 먹고 빈둥빈둥 대다 그림을 그리고 저녁을 먹고 일기와 에세이를 쓰다 보니 그때의 기쁨이 다시 기억났다. 에어팟에다가 써놯야겠다. 눈밭에서 찾은 돈 주고도 못 사는 행운의 에어팟! 하하하!


예전에 들었던 이야기 중에 일본에 태풍이 와서 사과농사가 완전히 망쳤다고 했다. 나무마다 몇 개의 사과들만 남겨 있었을 뿐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 사과를 환타스틱 하게 마케팅했다. 대입시험이 다가올 때쯤이었는데 '절대 떨어지지 않는 사과'라는 타이틀로 아주 비싼 값에 팔렸다는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마음을 먹는지에 따라서 인생이 달라지는 것 같다. 그래서 조지 버나드 쇼가 '인생은 자신을 발견하는 작업이 아니라 자신을 만들어가는 작업'이라고 말했나 보다. 마음먹기에 따라 자신을 만들 수 있으니까.



한 해가 끝나고 시작되는 기간이 겨울인 것은 무슨 의미일까? 마음 단단히 먹으라는 의미일까? 삶이 겨울처럼 춥고 외로울 거라는 메시지일까? 우리의 생애 같기도 하다. 연약한 맨몸으로 세상에 태어나 봄, 여름, 가을 같은 인생을 살다가 다시 맨몸으로 차가워지는 것을 보면 말이다. 하루의 끝과 시작도 밤이 깊은 자정인 거 보면 오묘한 의미가 느껴진다. 겨울에 펼쳐지는 새하얀 눈밭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얀 도화지가 아닐까. 창조주가 새로운 도화지를 줄 테니 다시 한번 네 삶을 멋지게 그려보라는 선물. 나에게 겨울은 끝과 시작의 의미를 알려주는 창조주의 편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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