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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리우스 Apr 05. 2023

공부보다 중요한

자존감

 친삼촌은 공부를 잘했다. 명문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맹장수술을 받고 깨어나자마자 곧바로 책을 봤다고 한다. 서울대 법대에 들어가서 사법고시를 패스하고 판사에서 부장판사로 계속 승진하며 현재 고등법원 판사로 일을 한다. 대법관도 되고 언젠가는 헌법재판관도 되면 좋겠다. 예전에 삼촌의 서울대학교 졸업앨범에서 개그맨 서경석을 찾아봤는데 신기하게도 있었다. 어렸을 때 삼촌에게 과외를 받지 않겠냐고 엄마가 물어봐서 싫다고 했다. 생각해 보면 좋은 기회를 놓쳤던 것 같다. 친가에는 판사삼촌을 비롯해서 공부를 잘하고 머리가 좋은 분들이 많았다. 


 반면 외가는 할아버지가 정치에 뜻이 있으셨 던 것을 제외하고는 학문과는 거리가 있었다. 와일드하고 화끈한 스타일의 최 씨 집안이다. 내가 봤을 때 나는 정확하게 피가 5:5로 섞여있는 거 같다. 책과 공부를 좋아하면서도 감정적이고 분위기 파다. 어떻게 보면 이도 저도 아닌 스타일이다. 공부를 특출 나게 잘하는 편도 아니고 그렇다고 화끈한 기분파도 아니니까. 


 귓속털과다증후군이라는 유전병이 있다. 귀에 털이 많이 자라는 유전형질이다. 그 유전형질은 Y염색체를 통해 유전되므로 여자는 없다. 대신 한 가문에 남자 한 사람이라도 그 유전형질이 있으면 집안 모든 남자가 Y염색체를 공유하므로 모두 귓속털과다증후군을 갖게 된다. 

 그런데 신기한 게 귓속털과다증후군은 태어나면서 바로 발현되는 게 아니다. 성인이 되고서도 서로 다른 시간에 발현된다는 것이다. Y염색체 안에 계속 숨어있다가 때가 되면 짠하고 귀에 털이 자라기 시작한다. 마치 몇십 년 만에 꽃봉오리를 터뜨리는 꽃처럼 말이다. 


 같은 유전형질을 갖고 있지만 서로 다른 타이밍에 발현되는 유전형질처럼 공부도 그런 거 같다. 어떤 사람은 초등학생 때부터 공부를 좋아하고 누군가는 30대에 공부포텐이 터지거나 다른 누군가는 60대에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초, 중, 고 검정고시를 붙고 수능을 준비하는 노인들도 있다. 물론 영원히 공부와는 담을 쌓는 분들도 있다. 우리나라처럼 지하자원이 없는 나라에서는 인적자원이 가장 큰 무기가 되니 공부 능력이 살아가는데 엄청난 강점이 된다. 

일찍 공부 포텐이 터진 사람은 좋은 대학교에 가서 평생 자랑할 수 있는 타이틀이 생긴다. 이 타이틀이 얼마나 좋은지 평생 어딜 가도 굳이 잘난 척을 안 해도 된다고 한다. 우린 다 잘난 척을 하는데 잘난 척을 안 해도 학교 이름 대면 인정을 해준다는 말이다. 그게 살면서 굉장히 편하고 좋다고 하는데 솔직히 부럽다. 대학을 다닐 때 어떤 교수님이 국적은 바꿀 수 있어도 학적은 바꿀 수 없다는 말을 많이 하셨다. 지금이라도 빨리 자퇴하고 수능 다시 쳐서 좋은 대학 가라는 현실적인 조언이었던 거 같다. 그 말을 들었어야 했다. 


 나도 공부포텐이 늦게 터졌다. 30대 중반 정도부터 책을 조금씩 읽었으니까 말이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고등학교로 돌아가고 싶다. 제대로 공부 한번 해보고 싶다. 핑계다. 지금 하면 되는데 말이다. 그냥 지금 하면 된다. 지금부터라도 그냥 하다 보면 잘 되는데 말이다.

공부를 잘하고 좋은 대학을 나오고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직업을 갖는 것을 부러워하는 것처럼 말했지만 사실 말도 안 되는 말이다. 나의 업적이 나의 가치가 절대 아니다. 저런 업적들은 분명 좋은 것이지만 나의 가치는 아닌 것이다. 어떠한 업적도 가치가 될 수는 없다. 우린 존재 자체로 가치 있다. 우리가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대학이 어떻든 직업이 어떻든 우리 존재의 가치는 그런 것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게 행복의 출발점이며 자존감의 시작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업적이 가치가 되고 학벌이 가치가 되는 나라다. 거기서 오는 폐해는 소름 끼칠 정도로 심하다. 자살률 1위, 행복만족도 최저, 이혼율 상승, 불평등 지수, 청렴지수 하위, 소득격차, 세대 갈등, 출산율 저하 같은 모든 문제의 뿌리에 자존감의 결여가 있다고 생각한다. 수능시험 잘 보는 공부가 중요한 게 아니다. 그런 사람은 많아야 5% 정도다. 남은 95%들도 행복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자신이 얼마나 가치 있고 소중한지 알고 깨닫게 하는 참된 공부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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