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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리우스 Jun 24. 2023

신난다! 현수막 자르는 공무원!12

은혜로운 역설의 진리 GRACEFUL IRONIC TRUTH

오늘 글은 책 [그리스도 안에서 자아 찾기 - 나는 누구인가요?] SFC 2021 이정규 지음 1장을 읽고 느낀 점과 생각을 정리한 글입니다. 기독교 진리를 바탕으로 에세이 형식으로 작성하였습니다.  



1. 은혜로운 역설의 진리 GRACEFUL IRONIC TRUTH  


13 여호와께 노래하라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음이니라 

14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 나의 어머니가 나를 낳던 날이 복이 없었더라면, 

     예레미야 20장 13-14절


 세상은 빛과 어둠, 하늘과 땅, 나와 너, 부모와 자녀, 개인과 공동체, 남자와 여자 같은 눈에 보이는 외현적 요소들과 기쁨과 슬픔, 성공과 실패, 사랑과 증오, 즐거움과 지루함, 탄생과 죽음 같은 보이지 않는 내현적 요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런 요소와 존재들은 서로 상반된 존재로 보이지만 우리 교회 담임목사님께서 종종 말씀하셨던 브레드 앤 버터가 버터 바른 빵이란 말처럼 구별되고 구분된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는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은 언제 할까요? 환희에 차있을 때나 감격에 젖었을 때 나는 누구인가 심각하게 질문하는 사람은 별로 없겠죠? 아마도 고통에 빠져있을 때 절망의 나락에 떨어졌을 때 나와 세상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될 때처럼 힘든 문제가 있을 때 하는 질문이지 않을까요?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찬양하자고 하자마자 곧바로 갑자기 신세한탄을 합니다. 그때 예레미야는 깜짝 놀랐을 겁니다. 


 '내가 지금 뭐 한 거지? 하나님을 찬양하다가 갑자기 왜 저주를 하는 거야?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자신의 삶을 저주하는 사람일까요? 책은 둘 다 예레미야의 모습이라고 말합니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서 슬픔이와 기쁨이는 분명 다르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고 둘은 라일리를 구성하며 결국 라일리는 하나의 인격인 라일리로써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죠. 


 책은 오스 기니스의 소명의 내용을 통해 나란 존재는 하나님께서 주신 나의 소명이라고 은근슬쩍 결론을 미리 말해줍니다. 이정규 목사님도 삶의 목적과 의미를 알게 될 때 나란 존재에 대해 알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어서 책을 썼다고 말합니다. 


  "당신은 스스로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사악한 죄인이면서 동시에 감히 바라거나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사랑을 받고 있답니다."  팀 켈러


 팀 켈러 목사님의 말처럼 우리 존재는 신기합니다. 죄와 사랑이 공존하니까 말이죠. 우리가 알고 있듯이 기독교는 이성적으로 따지고 들면 상당히 골치가 아플 수 있습니다. 어떤 죄를 지더라도 용서받을 수 있지만 결코 어떤 죄도 지어서는 안 되는 기독교의 가르침, 삼위일체, 부활, 천국과 지옥, 대속과 구원 같은 기독교의 진리 위에서 인간의 지성과 이성만으로 절묘한 균형을 잡고 일어서기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 진리를 아멘-하고 믿는 것은 기적입니다. 적극적 능동적 믿음의 고백조차도 믿어지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와 은혜가 있어야만 믿을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멀미가 날 정도로 어렵고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지만 신자들에게는 성령님의 역사하심가운데 신약과 구약이라는 멀미약을 먹여주시며 가르쳐주신 기독교의 역설을 저는 GRACEFUL IRONIC TRUTH 은혜롭고 역설적인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 진리의 역설逆說을 역설力說하는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고 믿습니다.






2. 사랑 그리고 고통  


 책은 비장의 카드를 꺼내듭니다. 저도 좋아하는 하이델베이크 요리문답 제1문답입니다. 


 문 :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답 :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는 나의 것이 아니요, 몸도 영혼도 나의 신실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보혈로 나의 모든 죗값을 완전히 치르고 나를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해방하셨습니다.  


 저도 10여 년 전에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1문답을 읽고 은혜의 감동의 물결에 잠긴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어찌나 위로가 되고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시편에서 젖 뗀 아이가 어머니 품에 있는 것처럼 마음이 몽글몽글해지고 평온했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신앙생활을 하면서는 그때만큼 감동을 받지 못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책 프롤로그에 어떤 자매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왜 자기를 만드셔서 고통스러운 세상에서 고통받게 하시는 거냐고 목사님께 물었다고 합니다. 저도 비슷합니다. 그 이유는 고통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셨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우리를 위해 중보 하시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인데 도대체 왜 우리가 실패, 좌절, 실망, 외로움, 불안 같은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고통을 허락하실까요?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우리에게 꽃길만 열어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신자로서 이 질문의 답을 찾고 싶었습니다. C.S. Lewis의 고통의 문제를 읽고 크리스천으로 살며 고통이 없다면 확실히 하나님을 붙잡고 의지하는 의지도 약해진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답조차도 저는 뭔가 부족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답은 아주 가까이 있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고통이 왜 존재하는가? 에 대한 질문의 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사랑과 고통이 절대로! 공존할 수 없고 공존해서는 안된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던 우리들에게 찰떡처럼 붙어있는 잘못된 믿음을 단번에 없애버리시는 우리의 영원한 구원투수 예수님께서 등장하신 것입니다.


 예수님만큼 하나님께 사랑을 절대적으로 받으신 분이 있으셨을까요? 심지어 하나님과 예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 사랑이신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는 완전한 사랑의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받으셔서 온전한 사랑으로 연합하신 예수님 조차도 십자가 고통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책을 읽다가 저는 갑자기 절벽에 떨어진 것처럼 하지만 하늘을 날 수 있는 날개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처럼 사랑과 고통은 공존할 수 없다는 저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랑과 고통의 관계를 알게 된 우리는 인생의 고통 속에서 '난 하나님께 사랑받지 않고 있어!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게 분명해!' 같은 말을 더 이상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고통의 문제에 대해 하나님의 사랑, 사랑의 하나님을 의심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것만으로도 보배를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안다고 그대로 살아낼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아는 만큼 살아 낼 수 있기도 하죠.  여기서 예수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또 비교하려는 분들이 있을 수 있겠죠? 역시 답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을 향한 사랑과 같거나 이상 over, beyond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표현으로 같거나 이상이지만 우리가 측량할 수 없는 Amazing한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칭의를 믿는 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 사실은 9회 말 만루홈런 역전승은 비교도 안될 정도로 짜릿하다 못해 심장을 찌릿하게 하는 복음의 정수입니다. 








3. 그리스도와 연합 


나는 누구인가? 질문을 바꿔서 나는 누구의 것인가? 나는 누구 안에 있는 사람인가?라고 질문해 봅니다. 바울의 편지들을 보며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책은 과거와 현대의 존재관에 대해 비교합니다. 과거에는 공동체 안에서 수동적으로 주어진 역할을 통해 정체성을 찾았다면 현대사회는 그보다 능동적이고 개인적으로 정체성을 찾아간다고 말합니다. 그 예로 겨울 왕국의 엘사를 이야기합니다. 엘사는 여왕이지만 Let it go를 부르며 국가 최고 통치자로서 의원면직절차도 밟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데로 살고 싶어서 왕궁을 무단 가출했습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들도 엘사처럼 자기 멋대로 사는게 멋지다고 배우고 믿고 행동합니다.

 하지만 자기 하고 싶은 사는 존재가 될 때 과연 행복한가에 대해 질문하며 여러 문제점들을 지적합니다. 


1. 우리은 우리가 정말 하고 싶어 하는 게 뭔지 잘 모른다.

2. 나는 공동체와 절대로 분리될 수 없다. 

3. 욕망성취의 실패에 대한 대안적 답이 없다.

4. 나의 욕망이 나를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


 저는 오래전부터 존재와 행위에 대해서 고민했습니다. 크리스천이 믿음과 행함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죠. 존재 Being와 행함 Doing의 균형을 어떻게 맞추며 살아가야 할지 잘 몰랐습니다. 

 저의 신앙생활을 예로 들면 존재 Being적으로 하나님의 자녀인데 굳이 성경이나 기도, 새벽기도를 꼭 해야 하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재벌 2세가 돈 걱정 안 하는 것처럼 하나님 자녀가 은혜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말씀을 안 읽거나 기도를 안 하고 예배에 소홀해지면 그러니까 행함 Doing을 하지 않으면 삶이 얼마나 피폐해지는지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가면서 몸빵으로 배웠고 계속 배우고 있습니다.

 

 '에이! 재벌 2세라고 용돈 팍팍 주는 것도 아니고 자기가 땀흘려 아르바이트해서 돈 벌어서 써야 하네!' 


같은 비슷한 생각도 했었습니다. 저는 특히나 성경을 안 읽고 기도, 찬송을 안 하면 머리가 아플 정도로 힘든 크리스천 체질을 갖고 있어서 존재 Being 보다는 행함 Doing 을 중요하게 여기는 행함파였습니다. 


 그런데 비밀 한 가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존재와 행함보다 더 중요한 게 뭔지 아시나요? 그건 다음에 말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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