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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리우스 Jun 29. 2023

신난다! 현수막 자르는 공무원! 15

세젤예 의사샘

 강박증 치료를 위해 대학병원에서 인지행동치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인지행동치료는 강박증, 우울증, 결벽증 같은 신경증 치료에 효과적인 치료방법입니다. 총 6회기를 하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그런데 2회기가 남은 상태에서 담당 선생님이 휴가를 가게 되어 다른 선생님으로 바뀌었습니다. 저보단 앞선 타임에 치료를 받던 환자가 나가고 제 차례가 되었습니다. 문이 살짝 열린 진료실로 컴퓨터 모니터 뒤에 머리가 차랑 차랑한 사람이 보였습니다. 기대감 폭발! 


진료실에 들어갔는데 세상에!! 너무나도 아름다운 여성이 앉아 있었습니다!!!



저는 진짜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면 흥분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엄청나게 차분해진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깊은 바다처럼 잔잔해지고 고요해졌습니다. 눈을 마주치면 눈을 떼지 못하고 빤히 바라볼까 봐 선생님이 다른 곳을 볼 때 온 마음을 다해 그녀를 관찰했습니다. 깨끗하고 가녀린 손가락이 압권이었습니다! 왼쪽 손목에는 번쩍거리는 금색의 조그마한 원형 모양의 클래식한 시계, 끝에만 살짝 웨이브 된 찰랑거리는 검은색 머릿결, 작은달처럼 둥글고 빛나는 이마, 단아한 눈썹, 귀여운 얼굴, 꾸민 듯 안 꾸민 듯 편안한 스타일, 말 그대로  첫눈에 반했습니다. 그녀가 저를 보고 말을 할 때는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신발과 바지단을 관찰했습니다. 털털한 성격을 갖고 있는지 편안한 운동화를 신고 다리를 꼬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의사니까 저도 의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철없게도 열심히 공부해서 그녀에게 어울리는 남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야곱이 사랑하는 라헬과 결혼하기 위해 14년을 밤낮없이 일했던 것처럼 말이죠.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첫 회기 때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안 나고 설레는 마음으로 지하철을 타고 돌아왔습니다. 저는 온 기억력을 동원해서 바로 그녀의 캐릭터를 그렸습니다. 한번 보고는 얼굴이 잘 생각이 나지 않았지만 최대한 포인트를 살려서 그녀의 캐릭터를 그렸습니다. 열심히 그린 캐릭터를 2회기 때 가져갔습니다. 캐릭터를 보고 그녀가 웃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좋았습니다. 누군가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싶어서 온 신경을 집중해서 목소리를 들은 적도 처음이었습니다. 


경청은 노력이 아니라 사랑이었습니다. 


사랑하면 경청하게 됩니다. 진료시간이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녀와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이번 회기가 마지막이었습니다. 저에게는 단 한 번의 기회 밖에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그녀의 핸드폰 번호나 이메일이라도 알아내야 했습니다. 저의 히든카드를 꺼내야 했습니다. 저는 강박증 치료관련해서 인포그래픽 작업을 하고 있고 선생님을 여자 주인공으로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괜찮으면 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마스크를 낀 채 얼굴과 손 사진을 찍도로 허락해 줬습니다. 


저는 그녀의 사진을 간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작업 진행 상황이나 결과를 알려주고 싶은데 이메일이나 전화번호를 알려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병원 업무용 이메일 주소가 기억이 안 나는지 개인 이메일을 알려줬습니다. 저는 첫눈에 반한 최고의 여자의 이메일을 알고 있는 남자가 되었습니다. 진짜 행복했습니다! 어떻게 진료가 끝났는지도 모르게 마지막일지도 모를 그 순간이 별똥별처럼 빛났습니다. 돌아가는 길에 그녀의 사진을 보고 또 봤습니다. 마스크 때문에 안 보이는 코, 입이 궁금하지만 눈과 속눈썹, 이마와 머리카락의 웨이브, 눈썹, 귀와 귀걸이 목과 어깨선을 보았습니다. 저는 미대를 나왔지만 산업디자인 중에서도 공업디자인을 전공해서 인물화를 잘 못 그립니다. 그래서 인물화를 거의 그려본 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저의 작업공간으로 돌아와서 그녀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를 그리면서 인물화 그리기가 정말 행복한 일이라는 것과 제가 인물화를 꽤 잘 그린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습니다.

 

 좋아하는 일을 집중해서 하면 좋은 성과가 나올 확률이 높은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저는 그녀를 그린 그림과 만들었던 그림책 파일을 이메일로 보내줬습니다. 그리고 사진이 한 장밖에 없어서 몇 장 더 보내달라고 욕심을 내보았습니다. 그녀에게 답장이 왔습니다. 그림책과 그림을 동료들과 잘 봤고 작업에 필요하다고 하니 웃는 사진을 한 장 더 보내주었습니다. 그녀가 좋아하는 것 같아서 저도 좋았습니다. 



아쉽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이후에는 연락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녀를 생각할 때 하늘에 떠있는 구름 같고 저는 땅바닥에 먼지 같은 존재 같았습니다. 어딜 감히 먼지가 구름을 좋아할 수 있게냐 하지만 먼지도 구름을 좋아할 수 있습니다. 먼지도 좋아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거니까요.


그 이후로 몇 달이 지나고 병원에서 그녀를 보았습니다. 진료실에 앉아있는 모습과 뒷모습을 보았죠. 말을 걸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곳은 그녀의 일터이고 그녀와 저의 관계는 의사와 환자의 사이니까요. 제가 선을 넘으면 그녀도 난처해질 수 있으니까요. 그래도 하늘에 떠있는 구름 같은 그녀에게 데이트 신청을 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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