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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리우스 Sep 26. 2023

Time to say goodbye

 장장 1년 4개월의 휴직을 끝낼 때가 되었다. 10월부터 복직을 하기 때문이다. 우선 직장으로 돌아가지만 아직 진로를 결정하지 못해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다. 16개월이면 480일, 11520시간이다. 1만 시간의 법칙이란 유명한 말처럼 1만 시간은 꽤 긴 시간이다. 내게 주어진 시간에 무엇이 남았나 돌아봤다. 

첫째, 가장 맘에 드는 건 글씨를 작고 또박또박하게 쓰게 됐다는 것이다. 매일 읽는 격월간 소책자가 있는데 책자 빈 공간을 다이어리처럼 사용하다 보니 글씨를 깨알처럼 작게 쓰는 습관이 생겼다. 뭔가 디테일하고 꼼꼼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좋다. 나는 메모를 열심히 하고는 다시 보지는 않는 이상한 사람이었는데 내가 적어놓은 메모를 다시 보는 게 아주 좋았다.  think about thinking 생각에 대해 생각할 수 있어서 좋은 것 같다. 


둘째, 결벽증이 좋아졌다. 나는 땅에 물건을 떨어뜨리면 반드시 물로 씻거나 소독을 해야 했다. 다른 재질은 물로 씻으면 되지만 종이가 늘 난감했다. 주민센터에서 일할 때 종종 서류를 떨어뜨렸는데 그럴 때면 민원인에게 꼭 떨어졌었다고 이실직고를 해야 마음이 편했다. 그러던 내가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인지행동치료를 받으면서 전공의 선생님과 함께 병원바닥을 뒹구는 노출반응방지 훈련을 하면서 결벽증으로부터 많이 자유로워졌다. 20년 가까이 땅바닥을 마음 편히 만져본 적도 없던 내가 병원 바닥에 드러누워 천장을 바라봤을 때 느꼈던 통쾌함과 행복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최고였다. 마치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앤디가 천둥번개가 치고 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날 쇼생크 감옥에서 탈옥하고 맛본 자유 같았다.  


셋째, 하루에 1시간 정도 영어성경을 계속 듣고 따라 해서 영어발음이 좋아진 것도 좋다. 더 체계적으로 공부를 했다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영어단어도 외우고 영어일기도 쓰고 외국인 친구도 사귀었으면 좋았으련만.

아쉽다. 

 후회되고 아쉬웠던 것도 너무나도 많다. 소설과 에세이를 여러 편 썼는데 정리할 엄두가 나지 않아서 책으로 못 만들고 있다. 언제쯤 세상의 빛을 보게 될지 미지수다. 여행을 가지 않았던 건 별로 후회가 되지 않는다. 여행 다큐멘터리 보는 게 훨씬 재밌고 편하고 돈도 안 든다. 그래서 여행 다큐를 많이 안 본 게 후회된다. 책을 많이 안 읽었던 것도 후회된다. 유튜브, 인스타그램, 카카오톡, 당근마켓, 데이트어플하면서 시간을 낭비했던 건 후회가 많-이 된다. 가끔 인사이트를 주는 정보를 얻을 때도 있지만 그래도 SNS는 멀리하는 게 좋은 거 같다. 운동을 열심히 안 했던 것도 후회된다. 태권도라도 꾸준히 했으면 검은띠를 땄을 텐데 아쉽다. 기타, 피아노, 탁구를 배우지 못해서 아쉽다. 후회되고 아쉬운 걸 반복하지만 않아도 인생은 얼마나 더 멋져질까


계획성이 없는 나는 역시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너무 괴롭고 불안해서 아침, 점심밥도 먹지 못했지만 지금은 점심을 먹을 수 있어서 감사하다. 만 나이가 없어져서 나이가 두 살이나 줄어들어서 기분이 좋았다. 

어제는 1년 넘게 도서관 2 열람실에서 얼굴만 봐왔던 처자에게 말을 걸었다. 며칠 안 남은 도서관 생활에 짧은 대화라도 하고 싶어서 커피를 마시자고 했는데 처자가 괜찮다며 싫다고 했다. 5급 행정고시를 준비하는 처자인데 잘 준비하길 바란다고 말해주었다. 하루 종일 곧게 앉아서 성실하게 공부하는 그녀에게 좋은 결과가 있으면 좋겠다. 


성경에 보면 우리 인생을 날아간다고 하는 말이 나온다. 지구가 어마어마한 속도로 날아가고 있는 것처럼 우리도 날아가고 있다. C.S.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 삼촌 악마 스크루테이프는 조카 악마 웜우드에게 조언한다. 인간을 괴롭히지 말고 도와주라고. 인간에게 빛나는 내일의 희망을 주고 계획을 세우는 걸 도와주라고 한다. 철저하고 멋들어진 계획을 세우고 환타스틱 한 미래를 품게 하고는 내일부터 하라고 속이라고 가르친다. 오늘 못한 건 내일도 못할 확률이 99.9%이다. 휴직한 첫날 못했던 건 휴직의 막바지에도 하지 못했다. 우리에게 영원히 내일은 없다. 우리에겐 현재만 있을 뿐이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시편 90:10

Our days may come to seventy years, or eighty, if our strength endures; yet the best of them are but trouble and sorrow, for they quickly pass, and we fly away. Psalms 90:10, N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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